창고는 되고 싶지 않아

by 이나은

그녀가 나를 찾아오는 시간은 21시 30분 무렵이에요. 그녀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어요. 아이들을 재우기 전에 씻겨주고 침대에 눕게 해요. 아이들이 한 권씩 골라온 그림책을 그녀가 읽어주면 하루의 육아가 끝나요. 그 후에 나에게 와요. 아이들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걸어서. 나에겐 책상과 의자가 하나 있고 책상 양 옆에 책장이 하나씩 있어요. 그리고 책상 반대편 벽에도 책장 두 개를 붙여 두었지요. 그녀가 나에게 오기 전부터 나에겐 천장에 빌트인 에어컨이 있었고 문 옆엔 붙박이장이 있었어요.

2017년 12월 27일 나는 그녀와 함께하게 되었어요. 그녀를 만나기 전에 연베이지컬러의 실크벽지로 새롭게 단장했어요. 아마도 그녀가 컬러와 소재를 고른 것 같아요. 그 당시엔 현재 책상이 있던 자리엔 2인용 오렌지색 소파가 있었어요. 소파 옆에는 현재와 같이 책장이 하나씩 있었고요. 소파 맞은편에는 책장 대신 TV가 있었어요. 그땐 해가 떠 있을 때 나에게 오는 사람과 해가 지고 오늘 사람이 달랐어요. 꼬마 숙녀가 잠에서 깨면 나를 찾아왔어요. 엄마를 불러 TV를 켜고 원하는 채널을 돌려 원하는 방송을 찾았지요. 뽀로로와 콩순이를 그때 알게 되었어요. 꼬마아가씨가 어린이집에 가면 가끔 그녀가 소파에 앉아 1~2시간 정도 TV를 보았어요.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꼬마숙녀가 다시 나를 찾았지요. 내 문을 열면 왼쪽에는 현관이 보이고 거실 복도 바로 맞은편에는 화장실이 있어요. 그런데 꼬마숙녀는 TV를 보다가 쉬가 마려우면 꼭 내 큰 형님-지금 킹사이즈와 퀸사이즈 침대가 붙여 있는 침실-이 품고 있는 화장실로 갔어요. 가끔은 TV에 집중해서 그랬는지 소파에 쉬를 싸서 내 바닥도 젖게 만들었지요. 내 바닥은 소재가 목재인 강마루로 되어있어요. 강마루 사이사이에 틈이 있어서 물기를 흡수하면 컬러가 진해져요. 갈색에서 진갈색으로 변해요. 아이가 내 안에서 실수하는 걸 그녀는 제일 싫어했어요. 바닥 사이에 소변이 스며들어서 냄새가 날까 봐 그런지. 사실 그녀는 청소는 잘하지 않거든요. 내 구석구석에 많은 먼지가 쌓여있어서 참을 수 없이 가려운데 말이죠. 먼지는 나중에 치워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청소는 계속 미루면서 아이가 내 바닥에 우유를 쏟거나 소변을 보면 즉각 반응했어요.

해가 지고 그녀가 나를 찾아오는 무렵이면 그녀의 남편이 나를 찾아왔었어요. 그녀의 남편은 2인용 소파에 구겨져 모로 눕기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TV채널을 바꾸며 주로 예능프로그램을 보았어요. 멀리서 그녀가 TV소리가 너무 크다고 하면 그녀의 남편은 방문을 조용히 닫았어요. 그녀의 남편은 TV 보다가 자주 잠이 들었어요. 가끔은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깨워줘야 침실로 돌아갔지요. 나는 그녀의 남편이 돌아간 후에야 쉴 수 있었어요. 자정 전 쉬는 날은 거의 없었어요.
그렇게 4년을 보냈어요. 그리고 2022년 12월에 그녀가 책상을 샀어요. 그리곤 나는 그녀의 방이 되었지요. 그녀는 TV를 나에게서 빼버렸고 소파는 현관문 밖으로 나간 걸 보니 이제 이 집엔 없는 것 같아요.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어요. 그 뒤로 꼬마숙녀와 그녀의 남편은 나에게 잠깐 들러서 필요한 물건을 찾을 뿐, 머물지는 않아요. 나의 바로 옆에는 둘째 형님이 있는데 거긴 꼬마숙녀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녀의 가족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그때 꼬마숙녀는 겨우 2살이었지요. 형이 그러는데 처음엔 미끄럼틀이 있다가 지금은 미끄럼틀 대신 어린이 책상이 있다는 것 같아요. 사실 나는 21년에 그녀의 둘째가 태어났을 때 어쩌면 내 안에 미끄럼틀이 들어오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 예상은 빗나갔어요. 둘째는 이제 5살이 되었는데 아직 자신의 방이 없어요. 그녀는 아들에게 나를 내어줄 생각이 없나 봐요. 그만큼 나를 아낀다는 말이겠죠? 그럼 청소나 좀 잘해주지.

아, 그녀가 나를 깨끗하게 닦고 정리하는 날도 있긴 해요. 가끔 그녀의 부모님이 찾았거든요. 그녀의 부모님은 보통 금요일 밤에 오셔서 나와 이틀이나 삼일을 함께 보내요. 그녀의 부모님이 오시면 나는 며칠 동안 그녀의 방이 아니에요. 그녀는 가끔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고 누워서 폼롤러를 목에 끼우고 있어요. 그 공간이 부모님의 잠자리로 바뀌어요. 내 바로 옆에 있는 둘째 형님 북박이장에 돌돌 말려 있던 매트랑 이불이 나에게로 와요. 그녀의 부모님이 내 바닥을 잠자리로 사용하는 동안 낮에는 두 아이들도 내 안에 한동안 머물러요. 그 시간들이 가장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들의 대화소리로 떠들썩해요. 그럴 때면 내 안에 사람이 살고 있구나 실감하는 때에요. 그녀가 혼자 있을 땐 말이 없거든요. 그녀는 주로 책상에 앉아요. 그러면 나는 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봐요. 천장에 달린 LED등을 켜 놓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지 책상 위 스탠드도 꼭 켜요.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이 마음에 드는지 연필이 미끄러지며 끗는 소리가 나거나 키보드 자판 눌리는 소리만 들려요.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등은 점점 구부러져요. 그녀의 이마가 책상에 닿을 것만 같아요. 내게 손이 있다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등을 펴라고 알려주고 싶어요. 가끔은 읽기도 싫고 쓰기도 싫은지 멜로드라마 대사가 들려요. 그녀는 태블릿 PC로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를 몇 번씩 돌려 듣곤 해요.

나에겐 책이 많아요. 그녀의 남편이 그녀에게 함께 방문했던 동네서점보다 더 책이 많은 것 같다고 하는 걸 들었어요. 그녀는 책을 매달 주기적으로 사요.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사 모은 책이 쌓여 이젠 책장이 가득 찼어요. 책장에 더 이상 빈 공간이 없자 내 바닥에 막 쌓아놓았어요. 다 읽은 책도 계속 보관하는 것 같아요. 보니까 그녀는 무엇이든 잘 못 버리는 거 같아요. 아주 예전에 받았던 편지도 모아두고 책도 쌓아두고 새 노트도 쟁여둬요. 남편이 키보드를 새로 사고 전에 사용하던 키보드를 그녀에게 주면 그녀는 또 그걸 버리지 않고 내 안에 보관해요. 그 키보드는 남편이 버린 쓰레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러더니 요즘엔 안 입은 옷도 나에게 보관하기 시작했어요. 쓰지도 않을 쇼핑백은 왜 그렇게 버리질 못하고 쌓아두는지. 신발 사고받은 박스는 왜 안 버리는 걸까요. 무겁고 답답해 죽겠어요. 내가 말을 못 해서 이러고 있는데 누가 내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 좀 전해주세요. 새 책 사기 전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책 좀 먼저 읽어 달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청소도 안 하고 나를 창고처럼 사용할 거면 5살 꼬마신사에게 나를 양보해 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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