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맞이하는 나만의 방법
추위를 많이 타고 남들보다 땀을 적게 흘리는 체질이라 스스로를 여름에 적합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낮이 가장 길어지는 시기가 다가오면 마음이 바빠졌다. 하루가 길어진 만큼 일상에 무언가를 추가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연애 같은 것. 여름형 인간이라면 여름에 가장 윤기가 날 테니까. 자랑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나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한 사람을 만나며 미운 정, 고운 정이 싹트려는 순간 두려움이 생기곤 했다. 그래서 여름마다 새로운 사람과 썸을 탔다. 적당한 셀럼을 유지하며 가벼운 관계를 맺어 서로에게 의무는 없는 사이가 좋았다. 답답한 구두를 사무실에 벗어두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퇴근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한여름 밤의 산책시간이 좋았다. 시시껄렁한 대화를 이어가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다가 눈 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얼음 사이를 채운 라떼를 마시며 체감하는 시원함이 좋았다. 소설가의 에세이집을 사서 한편 씩 번갈아 소리 내어 읽었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까지 추가되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우리 사이의 적당한 간격이, 이 여름이 영원하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 관계는 계절이 변화와 함께 시들해졌다.
여름이 아닌 가을에 처음 만나게 되어서 일까 지금의 남편과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아이도 둘이나 태어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성큼 다가왔지만 이제는 절기와 상관없이 매일의 일상이 육아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연애는 TV 속에만 있는 기분이다. 아이들이 잠들면 더운 날 그보다 더 뜨거운 온도의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다. 그러면 아주 잠깐 주변의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맥주 한 캔을 따서 남편과 나눠마시며 멜로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본다. 모든 게 완벽하게 연출된 아름다운 배경 속 잘 짜인 남녀의 이야기를 보며 대리 만족한다. 맞아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지. 과거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남편과 연애 시절 싸우고 화해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발바닥이 찌릿할 때가 있다. 추레한 우리의 모습은 기억에서 사라졌고 가장 좋았던 순간만이 남아있다.
하원한 딸아이와 함께 산책을 하며 이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꽃의 이름을 알려주고 향을 맡게 한다. 여섯 살 무렵, 주인집 마당에 피어있던 하얀 꽃의 향을 맡아본 적이 있다. 그 후로 달큼한 그 향을 잊을 수 없었는데 꽃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엄마에게 설명해봐도 무슨 꽃을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말만 돌아왔다. 최근에서야 그 꽃이 치자나무 꽃이었다는 걸 알았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과 여름에 해야 제 맛인 일들을 떠올리고 실행하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본다. 여름엔 감기 걱정은 덜고 아이가 먹고 싶다는 아이스크림도 자주 사줄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이번 여름엔 수영장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좀 더 커서 수영을 배우게 된다면 더운 날 잠영을 하며 피부와 귀로 느껴지는 감각을 아이도 좋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을 아이도 함께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국민학교 여름 방학이면 친가에 가서 보름 이상의 시간을 보냈었다. 한 번은 할머니를 따라 산으로 버섯을 따러 갔다가 에메랄드그린 색의 뱀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할머니와 나보다 더 놀란 뱀이 도망가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은 웃음이 난다. 징그럽고 무섭기만 하던 뱀의 소심한 모습을 보고 조금 귀여워졌달까. 논두렁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엉덩이가 논으로 빠져서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기억도 있다. 당시엔 사촌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어 싫었지만 돌아보면 도시 깍쟁이에게 수더분함을 한 스푼 더해준 시간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전등을 끄고 일찍 잠드시면 이부자리에 누워 개구리울음소리만 듣던 저녁도 떠오른다. 장난감 없이 학원도 가지 않으며 생긴 시간들을 심심하지 않게 농수로에서 수영도 하고 미꾸라지도 잡으며 보냈던 시간들. 도시와 달랐던 환경에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자연과의 친분이 쌓았던 시간을 통해 얻은 정서들이 소중하다.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는 여건은 부족하지만 여름 하면 떠오를 단어와 추억을 아이에게도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 시간이 지나 함께 했던 추억이 흐릿해지고 왜곡될 기억 대신 사진을 찍고 일기를 남겨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