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넷(Tenet, 2020)
'테넷'이 덜 유명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을 안다. 하지만 '테넷'이 어떤 내용인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그로 인해 이 영화는 놀란 감독의 최근 블록버스터 중 상대적으로 덜 사랑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 전 글에서 다룬 프레스티지와 다르게, 스포일러가 있어야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에, 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두 번째 시간으로 리뷰하게 되었다.
이 영화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의 CPT 대칭(CPT Symmetry)과 물질-반물질 쌍소멸(pair annihilation)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파인만 다이어그램(Feynman Diagram)을 그려가며 봐야 한다. 미친 건가. 물론 과학적으로 이해하면 더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놀란 감독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
영화의 주인공은 단 한 번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주인공'이라는 아주 친숙한 단어가 있으니 이를 이용하자. 이 주인공은 저명한 배우 덴젤 워싱턴의 아들이다. 아직까진 아빠 커리어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잡고 있는 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인류 문명을 멸망시키려는 미래 세력의 음모를 막는 작전이 이 영화의 줄거리가 된다. 문장으로 써 놓으니 굉장히 유치해 보이는데, 이 유치한 문장을 '있어 보임'의 절정으로 만드는 것이 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역량 아니겠는가.
주요 줄거리는 이렇다. 미래의 세계는 두 진영이 서로 대립하게 된다. 이 시기는 이미 인버전(시간 역행) 기술이 상용화된 미래. 양 쪽 진영 중 회의를 느낀 한 진영이, 이 세계를 과거에서부터 멸망시키고자, 과거의 인물 중에서 생에 대한 의지가 없는(또는 곧 없어질) 한 사람에게 접근해 이 사람을 통해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테넷 일당과의 대결이 영화의 줄거리가 된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기술은 미래 진영 기준에서 이미 과거에 개발이 되었으나, 이를 개발한 과학자는 이 기술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이 기술을 실현하는 장비(알고리즘)를 9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당시 핵 보유국인 9개의 나라에 숨기고, 과학자 스스로 자살한다. 이 중 구 소련의 핵 시설 중 하나인 스탈스크-12의 플루토늄이 폭발하면서, 알고리즘 하나가 사토르(SATOR)라는 사람에게 발견되는데, 사토르는 이후 췌장암에 걸릴 운명이고, 미래에서는 이 것을 미리 알고 있다. 이에 미래에서는 사토르가 세상을 멸망시킬 알고리즘을 모을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이라 생각하여, 사토르가 나머지 알고리즘 8개를 찾을 수 있도록, 이미 쓰여 있는 미래의 정보를 제공하고, 또 기술을 제공해 사토르가 범죄를 통해 부와 힘을 축적할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 알고리즘을 얻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테러를 가장한 전투가 시작된다. 이게 영화의 시작인데, 영화의 시작에서 이 정보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여러 번 볼 수록 그 재미가 더 해지는 영화다. 이 영화는 영화 내에서의 순서를 따를 때, 오페라 극장 테러 진압, 뭄바이 진입, 오슬로 프리포트 침투, 탈린 추격전, 스탈스크-12 전투 순으로 진행된다. 이 중 몇 개의 장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인지, 어떤 장면에서의 누가 시간 역행을 했는지 등을 알아보려면, 정말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하는 영화이기에, 볼 때마다 이해되는 장면들이 늘어나고, 볼 때마다 감탄할 요소가 늘어난다. 누군가는 미래에서부터 시간을 역행해서 과거로 갔다가 다시 역행해서 지금으로 온 사람이고, 누군가는 정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람, 누군가는 역행을 몇 번이나 반복한 사람이다. 하나의 동일한 인물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혹은 다른 장소에 공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① 정방향으로 진행하는 A, ② 미래의 A가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와, 다시 역행하여 정방향으로 ①의 A와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A, ③ ②의 A가 작전 진행 중 불가피하게 다시 시간을 역행, 역방향으로 시간을 진행하면서 ①의 A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A가 있을 수 있다. 쓰면서도 헷갈린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들을 알아보고 알아내고 이해하려 든다면, 영화 감상을 망칠 수밖에 없다. 처음 볼 때는, 그냥 쭉 보자. 보고 나서 궁금하면 찾아보고, 또 보고, 또 찾아보고, 또 보면 된다. 이 것을 반복할수록, 너무나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1회 차이든, N회차 감상이든, 혹은 보지 않았거나 보지 않을 거라 하더라도, 이 영화가 던지는, 그리고 우리 삶이 던지는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이 있다. 우리의 삶이 이미 다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연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주어진 미래라면, 지금 왜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하고, 잠을 이겨내고 출근을 해야 하며, 힘들어도 참고 운동을 해야 할까. 이 영화에서는 지속적으로 What's Happend, Happend.라는 말이 나온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정도로 의역이 되는데, 이 말 자체가 우리의 허무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대사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멋지다가, 마지막에는 밑도 끝도 없이 멋있어지는 또 다른 주연인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닐(Neil)의 대사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선사한다.
[닐(Neil)]
"What's happened's happened."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말,
Which is an expression of faith in the mechanics of the world.
그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야.
It's not an excuse to do nothing.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가 아니지.
[주인공(Protagonist)]
Fate?
'운명'을 말하는 거야?
[닐(Neil)]
Call it what you want.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주인공(Protagonist)]
What do you call it?
너는 뭐라고 부르는데?
[닐(Neil)]
Reality.
'현실'이지.
만약, 정말 만약에 운명론적으로 세상일이 다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라는 사람이 오늘을 나답게 열심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갔기 때문에 발생하는 미래라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라는 게 닐(Neil)의 말이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조차 현실이라는 것.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그걸 믿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정해진 미래가 온다는 말이, 그 어떤 허무주의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닐(Neil)의 대사는, 그 이상으로 너무나 슬프고 감동적인 대사이기 때문에, 한 번 이해된 시점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다.
한 번 볼 거라면 안 보는 것도 괜찮다. 두 번 이상 볼 예정이라면, 강력하게 추천하는 영화이다. 시간 구성의 미로를 풀어내는 쾌감과, 허무한 오늘을 이겨내게 해 주는 닐의 따뜻한 연기를 보고 싶다면, 여러분도 꼭 이 영화를 여러 번 봤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N회차 관람하시는 분들을 위해, 타임라인을 정리한 내용을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