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습관
가족이 잊히고 있다.
중요한데 자꾸 까먹는 건 뭐?
루틴에 넣는다.
그래서 가족을 저녁 루틴에 넣는다.
에이 맨날 보는 가족인데 무슨 루틴에 넣어.
그런가? 맨날 보는 게 확실한가?
수업에서 만나는 아이들, 애 아버지가 된 동기들 이야기론 서로 얼굴 보기 힘들다고 한다.
예전에 본 그 가족이 지금 가족이 맞을까?
부모도, 아이들도 변한다.
갓난쟁이 때 보았던 보송한 그 아기는 털이 숭숭 난 지금 아이와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배워야 할게 산더미다.
아예 루틴 블록의 이름을 가족 블록으로 바꾸는 것도 추천한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유독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마도 미국이란 나라가 다양한 인종이 섞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이라는 것, 내가 누구냐에 대한 답이 만만치 않다.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장녀인지 막내인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없고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것으론 정체성을 말할 수가 없다. 쌍꺼풀이 없고 한국에서 태어난 내향적인 장녀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땐 쌍꺼풀이 없었지만 나이 들며 지방이 빠져 쌍꺼풀이 생겼다. 어렸을 땐 외형적이었지만 지금은 내향적이다. 나를 나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다. 얼굴도 똑 닮고, 목소리도 똑 닮은 모창가수들이 있지만 그들이 진짜 가수는 아니다. 가수를 키워준 할머니, 가수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 함께 일한 동료들에게 똑 닮은 모창가수가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관계를 통해야 내가 보이고 나를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친구 관계나 사회에서 맺은 관계는 많이 변한다. 정체성은 변한다.
변해가는 나에게 기준이 되어주는 것이 가족 관계다. 나의 시작을 기억하는 관계다. 나의 성장을 지켜봐 주는 관계다. 내가 지나간 자리도 기억할 관계다. 그래서 지켜야 한다. 나를 찾기 위해서.
아이들에겐, 그리고 부모들에게도 이 블록은 필수다. 서로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된다. 부모님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 뱃속으로 나았는데 누구 자식인지 모르겠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유전자가 반반 섞여 새로운 인간이 만들어졌다. 반을 모르는데 나한테 반이 왔다고 다 알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오판이다. 나머지 반은 다른 인간한테서 왔고, 반반 섞이며 만들어낸 성질은 예측불가다. 이해가 안 돼서 배워야 한다. 왜 배워야 하냐고? 이해가 안 되는 아이와 나의 관계를 통해 부모라는 나의 정체성이 완성된다. 궁금하지 않은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의 새로운 정체성. 평생 인내심이라곤 없던 내가 생각보다 인내심이 많은 인간이었을 수도 있다.
가족 블록이라고 정상회담하듯 식탁에 각 잡고 앉아할 말도 없는데 멀뚱이 바라볼 필요는 없다. 저녁 준비를 같이 해도 되고, 설거지를 하며 이야기를 해도 되고, 숙제를 식탁에 가지고 나와서 해도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자연스럽게 가족 블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놀아달라고 블록을 통째로 가지고 나오기도 하고, 아빠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한다. 하루에 아이들을 2-3시간만 보는 부모들은 힘껏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이상적이다. 아이들이 커서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그날 일을 이야기하고, 보드 게임을 같이 하며 매일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매일 저녁을 그렇게 보내는 텔레비전 속 광고 같은 가족은 드물다. 오늘 뭐하고 노나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다. 특히나 일상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빠는 뉴스를 보고 아이들은 식탁에서 숙제를 하는데도 관계냐고? 난 관계라고 생각한다. 방학에 부모님들을 만나면 아이가 방에서 안 나온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학교나 학원 다녀오면 하루종일 방에 있다고 한다. 이런 관계에 비하면 거실이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도 큰 발전이다. 여기서 핵심은 눈은 뉴스를 보고, 숙제를 보고 있더라고 귀는 상대를 통해 열려 있다는 거다. 서로를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다. 아이가 숙제를 하다 물어도 뉴스 보는데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고 한다거나, 숙제하니까 뉴스는 들어가서 보라고 하지 않는다. 아이도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숙제를 가져오거나, 집안 일을 함께하며 같이 있는 습관을 배운다.
블록을 모두 채울 필요도 없다. 블록은 가이드라인일 뿐이다. 저녁 후 남은 시간을 텔레비전을 볼 수도 있고 산책을 할 수도 있다. 저녁을 함께 다 먹고 함께 치운 후 사정이 있으면 각자 방으로 가서 안 될 이유는 없다. 방에 들어갔다고 해도 이 블록에는 빨래 좀 걷어달라고 쓰레기 좀 버리고 와 달라고 부르는 걸 예상해야 한다. 방문을 닫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방 문도, 귀도 열어둔 서로를 위한 시간이다. 결국 뉴스나 보고 숙제나 할 건데 꼭 함께 있어야 하냐고? 낯설고 대면대면한 가족일 수록 더 노력해야 한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더라도 가족을 위해 비워놓아야 한다. 자리가 있어야 특별한 날도 온다.
자리를 비워두는 노력으로 쓸데없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때로 동문회, 회식 같은 사회적인 관계와 루틴을 나눠가져야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가족을 위한 자리다.
아이들한테도 흐지부지하기 쉬운 가족 블록의 규칙을 명확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가족루틴을 지키지 않았다면 더더욱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우선순위는 가족이다. 숙제를 해도 되고 게임을 해도 되지만 우선순위는 가족이고 귀와 마음을 서로를 향해 열어 놓는 시간이라는 걸.
퇴근해 들어오니 수험생인 아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다.
가족 블록 시간의 적절한 반응은?
아이고, 00 이 아빠 기다렸구나.
가족 시간이다. 게임을 했지만 아빠가 보이는 곳에서 기다린 것이니 아빠가 우선순위로 인정받은 거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밟히지만 아들이 우선순위다.
이렇게 특별한 게 없이 쉬운 게 가족 블록이냐고?
이걸 못해서 가족이 없는 외로운 고아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모든 블록 다음 순서가 꿈 블록이냐고? 꿈을 제일 먼저 놓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없으면 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