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2020)
장강명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동명의 팟캐스트도 들은 적 없고 방송에서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쓴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한번 듣고는 잊을 수 없는 제목이라 그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초면'인 와중에 왜 이 책을 샀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날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들어있어서 그의 소설 '표백'을 포함한 다른 책들과 함께 결제했다.
읽고 쓰는 종족
표지에는 "책, 이게 뭐라고"라는 제목과 "장강명 지음"이라는 글쓴이 이름 사이에 "읽고 쓰는 인간"이라는 글이 들어가 있는데, 나는 이게 "가수 안예은"(지금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안예은의 '사람들은'이다)처럼 자신의 직업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예스24가 운영하는 채널예스와의 인터뷰를 보니 이건 부제였다.
사실 책 제목으로 ‘읽고 쓰는 인간’과 『책, 이게 뭐라고』, 이렇게 두 가지를 검토했어요. 출판사에서도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고, 저도 결정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읽고 쓰는 인간’은 내용과 썩 어울리는데 에세이보다는 인문서처럼 무거운 느낌이고, ‘책, 이게 뭐라고’는 제가 진행했던 팟캐스트 이름과 겹쳐서 헷갈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다 제목의 느낌이 약간 가볍지 않나 하는 고민도 있었습니다. 결국 ‘책, 이게 뭐라고’를 낙점하면서 ‘읽고 쓰는 인간’도 아까워서 그렇게 표지에 넣게 되었어요. - 장강명, “책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여기 있어요” (채널 예스)
사실 어느 쪽이든 잘 어울린다. "읽고 쓰는 인간"은 장강명 작가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같은 인터뷰에선 이 책의 주 타깃 독자를 "읽고 쓰는 일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저의 동족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장강명 작가가 나를 안다면 그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장강명 작가의 '동족'에 꽤나 가까운 사람이다. 2020년 말, 사람들 앞에서 이런저런 강연이나 발표를 하고 난 뒤엔 "말하기의 시간"이란 글을 쓰긴 했지만, 결국 읽고 쓴 것들에 대한 말을 하는 일이었다. 성의 없이 쓴 글을 보면 화가 나고, 꼼꼼하고 집요하게(나는 아름다운 글보다는 이런 글이 더 좋다) 쓴 글을 보면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보다 글로 더 많이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장강명 작가는 말하고 듣는 사람과 읽고 쓰는 사람 사이에 우열을 따지는 사람들(에필로그에 갑자기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형 포함)을 여럿 언급하고 살짝 꼬집기도 하지만, 자신이 우열을 따지지는 않는다. 다만 비언어적 표현과 맥락을 중시하는 말하고 듣는 사람들에 비해 읽고 쓰는 사람들은 일관성을 중시하고, 반성적이며 공적인 인간이라 약간 무겁고 얼마간 쌀쌀맞은 진지한 인간이 된다고 말하다. 그리고 재수 없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재수 없는 사람
이 책 156페이지에 장강명 작가는 자신을 공적이고 반성적이면서도 이웃을 경멸하는 오만하고 재수 없는 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문장이 나오기 전 이미 나는 장강명 작가가 좀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고로 내겐 재수 없다는 말이 꼭 욕인 것은 아니다. 자신이 어떤 것을 잘하는지 알고, 그 잘함을 드러내는 것은 조금은 재수 없지만 밉지는 않다.
장강명 작가는 책의 곳곳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부끄러운 속마음을 드러내지만, 사실은 이런 방식으로 그냥 하면 무례해 보이거나 대놓고 '멕이는' 것처럼 들릴 말을 조금 더 우아하게 하고, 자신을 조금 더 멋지게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자기소개서 "당신의 단점을 서술하시오"에 대해 단점인 듯 단점 아닌 장점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좀 재수 없었는데, 그 재수 없음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작가로서 조지 오웰을 롤 모델로 삼는다는 부분을 읽을 땐 동족애를 넘어 가족애를 느꼈다.
내가 '장강명 작가는 좀 재수 없어'라고 투덜거린다면, 주변에선 '너도 비슷하게 재수 없다'라고 할 것이다. 근데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고 재밌고 또 닮고 싶다. 조금 재수 없긴 하지만.
집요한 사람
장강명 작가의 글은 꼼꼼하고 집요해서 좋았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화를 소개하면서 '영리하고 명료한 사람들'과 업무 하는 게 즐겁단 말을 했는데, 그는 그냥 그래서 좋았다고 쓰는데 그치지 않고 '업무 성격이 뭔가를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종류의 일이고, 부담이 크지 않고, 돈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가 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더 그랬던 것'같다고 덧붙였고, 그것도 모자라 '무엇보다 세부 사항을 챙겨주실 분들이 따로 계시기도 했'다는 이야기까지도 더했다.
이런 식으로 누가 '팩트체크'를 하러 따라다니는 것도 아닌데, 당사자가 아니라면 기억조차 하지 못했을 자세한 내용까지 꼼꼼히 써놓은 부분과 어떤 주장을 펼치면서도 그 주장이 절대적이지 않고, 독자가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도록 자신과 독자를 위한 뒷문을 만드는 일을 잊지 않는 것을 보는 게 즐거웠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아름다운 글 보다 꼼꼼하고 집요한 글이 좋다. 「책, 이게 뭐라고」의 모든 부분이 그런 것도 아니고, 그의 글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아니지만(사실 난 아름다운 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의 글을 읽으며 킥킥거리거나 즐거웠던 부분은 읽기와 쓰기, 그리고 책에 대한 자기 생각을 꼼꼼하고 촘촘하게 풀어놓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많이 쑥스럽긴 하지만,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가 장강명 작가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국의 읽고 쓰는 종족이여 단결하자
장강명 작가는 우리 '동족'들이 현대 사회에서 당하는 핍박에 대해 말한다.
현대사회는 진지한 인간들을 싫어한다. (중략) 그런 이들은 '왜' 같은 질문에 긴 답을 품은 사람들을 떨떠름히 여기고, 진지충이라고 놀린다. - 장강명, 「책, 이게 뭐라고」
매우 공감한다. 읽고 쓰는 종족은 어딜 가든 뭘 그리 심각하냐느니, 왜 그렇게 캐묻냐느니, 꼭 그런 이야길 지금 해야 하냐는 핀잔을 듣는다. 쿨하고 쉬운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닌데도, 심지어 속으로는 다들 복잡하면서도 쉽게 쉽게, 좋게 좋게 가고 싶어 한다.
어떤 일의 보이는 것만 보고 혹은 한쪽 편의 주장만 듣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그리고 복잡한 글을 직면하거나 복잡하게 생각하는 능력은 마치 외국어와 같아서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쉽게 쉽게'의 세상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담론이나 여론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될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책이 중심에 있는 사회'를,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포털 뉴스 댓글이나 인터넷 게시판, 소셜미디어가 아니라 단행본으로 만들어 이야기하는 사회'를 꿈꾼다고 한다. 나도 사람들이 세상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글을 직면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우리에겐 그런 글들을 이해하고 그 글을 가지고 토론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세상은 더 많은 사람이 글을 쓰고 읽고 토론해야 온다. 읽고 쓰는 종족이 서로를 약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대의를 위하여 만국의 읽고 쓰는 종족이여 단결하자.
「책, 이게 뭐라고」에는 이 외에도 팟캐스트 이야기, 구글 스프레드 시트를 활용한 독서 토론 이야기, 다양한 작가와 작품 이야기, 장강명 작가가 글쓰기 교과서로 썼다는 '끝내주는 책'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자신을 쓰고 읽는 종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에서 많은 위안과 공감을 얻을 것이고, 자신이 글이나 책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새해를 맞아 책과 한걸음 더 가까워지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