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ODA책무성법의 가능성과 한계
2021년 2월 1일 아침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쿠데타로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시민들의 생명은 군홧발에 짓밟혀 스러지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공공연하게 사람들을 학살하고 억압하고 있지만 미얀마 밖의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많은 이들이 국제사회의 역할이나 민주주의, 인권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겠지만, 특히 미얀마에서도 여러 사업을 하던 국제개발협력 분야엔 무거운 질문이 던져졌다. 쿠데타 직후 국제 송금이 막히고, 군부의 통제와 직원 안전에 대한 우려로 현지 활동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국제개발협력 분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라는 실천에 대한 질문부터 미얀마에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국제개발협력 분야는 무엇을 했는가? 라며 반성하는 질문까지, 쉽지 않은 질문에 몇몇 이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책무성 등의 키워드로 가능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그중에 미얀마 시민과의 연대를 위해 모인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의 네트워크인 "국제개발협력 커뮤니티 얼라이언스(국커얼)" (인스타그램, 아카이빙 페이지 '미얀마, 봄')가 있다. 국커얼은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에 기여하기 위한 국제개발협력 활동, ODA를 위해선 어떤 제도가 필요할까?", "미얀마와 같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제개발협력 행위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따라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국제개발협력과 발전에 대한 대안을 찾는 시민사회단체 발전대안 피다와 교류할 기회가 있었고, 캐나다의 공적개발원조 책무성법(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Accountability Act, 이후 ODA책무성법)에 대해 알게 되어 사례연구를 진행했다.
ODA책무성법을 살펴보기 전에 '책무성'이란 단어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무성이란 단어는 여기저기서 많이 쓰이지만 아직 합의된 정의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책무성에 대해 여러 번 들으며 나름대로 정의한 책무성은 "떳떳하게 설명하기"다. 어떤 일을 왜 그리고 어떻게 하는지, 참여 지역과 국가, 참여자는 어떻게 선정했는지, 이 일이 그 지역의 환경과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사업이 끝났다면 그 결과는 어땠는지를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책무성을 갖춘 상태이고, 책무성을 갖추기 위해선 사업의 기획부터 평가, 종료까지 전 과정에서 일에 관련된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기록하며, 영향에 대해 조사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책무성은 누구에 대한 책무성인가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참여자(수혜자)에 대한 책무성이다. 사업 기획단계에서부터 그 사업을 하려는 이유와 그 영향에 대해 사업지역 시민, 사업국 정부에게 설명할 수 있고, 사업 수행과정에서도 과정과 결과를 설명할 수 있도록 소통(공청회, 시민 면담, 이해당사자 회의, 보고서 공유 등)하고 정보를 만드는 것(수요조사, 사업 성과평가, 보고서 발행 등)이 참여자에 대한 책무성을 위한 활동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도너(Donor, 개인 기부자, 배분기관 등)에 대한 책무성이다. 개인 기부자, 정부 혹은 민간 재단, (ODA 사업의 경우) 납세자에게 사업의 배경과 목적, 진행사항과 결과를 설명할 수 있도록 소통하고, 정보를 축적하며 공유하는 것이다.
영국 단체로 비영리단체가 재무관리를 잘할 수 있도로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하던 MANGO(2017년 InsideNGO, LINGOs와 통합되어 Humentum이라는 단체가 됨)에서 만든 "수혜자에 대한 책무성 체크리스트: 여러분의 단체는 수혜자에게 얼마나 책임을 지고 있나요?"에도 (NGO가 수혜자에 대한) 책무성을 정의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는 책무성을 "사람들에게 당신의 NGO가 일하는 동안 생기는 중요한 결정을 이해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실무적으로는 아래 다섯 가지 요소가 수혜자를 위한 책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수혜자에 대한 책무성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1) 정보 제공
(2) 취약계층 대표
(3) 의사결정 과정 참여
(4) 이의제기 혹은 불만처리 절차(Complaints procedure)
(5) NGO 직원의 태도
캐나다의 ODA책무성법은 크게 법명(Short title), 목적(Purpose), 해석(Interpretation-용어 정의에 해당하는 부분),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보고(Reports), 시행(Coming into Force)으로 구성되어있고 전문을 다 해도 약 850 단어로 분량이 많지 않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개발원조위원회(OECD DAC) 회원국 중 내용적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손혁상 2011) 앞서 이야기한 '책무성'의 뜻을 곱씹으며 이 짧은 법을 통해 캐나다 정부는 누구에게 자신의 ODA를 설명하고, 누구와 함께 만들어나가고자 하는지 살펴보자.
캐나다 ODA책무성법의 목적과 용어 해석
이 법은 캐나다의 모든 공적개발원조가 빈곤감소에 초점을 두는 동시에, 캐나다의 가치, 캐나다의 대외정책, 2005년 원조효과성 제고를 위한 파리협약, 지속가능발전, 민주주의 증진에 부합하며 국제인권기준을 증진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2조 1항)
아름다운 내용이지만, 모호한 개념들이 있어서 3조(해석)를 살펴보았다.
- 캐나다의 가치(Canadian values): 세계 시민권, 공평성, 환경적 지속가능성
- 민주주의(Democracy):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 정해진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권리를 포함하는 것
- 국제인권기준(International human rights standards): 캐나다가 가입한 국제인권협약들과 국제 관습법이 정하는 인권 기준
- 공적개발원조: (a)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발전과 복지 증진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국제원조로, 무상 지원(Grant) 요소가 최소 25% 이상이어야 하고 4조(공적개발원조)에서 정하는 요구사항도 충족하는 원조 거나 (b) 캐나다 밖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 혹은 인간에 의해 생긴 재난상황의 영향을 줄이기 위한 원조
캐나다 ODA의 책무성
그렇다면 캐나다 정부는 이 법을 통해 누구에게 어떤 ODA책무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 내용은 공적개발원조에 대한 내용이 있는 4조와 보고에 대한 내용이 있는 5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4조 1항은 캐나다 ODA의 세 가지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1) 빈곤 감소에 기여함 (contributes to poverty reduction)
(1.1) 1항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밖에서 일어난 자연재해 혹은 인간에 의해 생긴 재난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ODA가 제공될 수 있다.
(2) 가난한 사람의 관점을 고려함 (takes into account the perspectives of the poor)
(3)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함 (is consistent with international human rights standards)
이어지는 4조 2항 '협의'(Consultation)는 관계부처 장관이 최소 2년마다 1회 정부, 국제기구, 캐나다의 시민사회와 협의하고 그들의 의견과 제안을 고려해야 함을 정하고 있다. 그리고 5조 '보고'(Report)는 관계부처 장관이 매년 ODA 지출액과 활동 내용 등을 의회에 보고하고 각종 통계가 담긴 보고서를 발행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내용을 통해 캐나다 정부는 자국 의회, 시민사회, 국민(4조 1항 협의, 5조 보고) 뿐 아니라 사업 참여자/수혜자(4조 1항 (2) 가난한 사람의 관점을 고려함)와 국제사회(4조 1항 (3)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함)에 대한 책무성까지도 고려한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캐나다의 ODA가 캐나다 정부가 정한 원칙인 빈곤감소와 국제인권기준 보호 혹은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규정으로 역할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캐나다 ODA책무성법과 한국 국제개발협력 관련 제도
지난 8월 25일 국회에선 "미얀마 사태로 본 한국 사회의 인권책무성 향상을 위한 법제도 개선 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서 발전대안 피다 한재광 대표는 '외국의 심각한 인권침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한국 ODA 개선방안"에 대해 발표했는데, 그는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개도국 민주주의와 인권지원 현실을 크게 법적 측면과 정책적 측면에서 이야기했다. 법령으로는 '국제개발협력기본법', '국제개발협력기본법 시행령', '해외긴급구호에 관한 법률'을 분석했고, 정책은 '제3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2021-2025)', 'KOICA 인권기반 개발협력 이행계획(2020-2023)' 등을 다루었다.
인권의 관점에서 본 한국 국제개발협력 법령과 정책의 한계와 정책제안 내용은 토론회 자료집에 잘 정리되어 있어 전체 내용에 대해선 여기서 다루지 않고, 캐나다 ODA책무성법과 연결할 수 있는 내용 세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국제인권기준에 대한 언급이다. 캐나다 ODA책무성법은 앞서 살펴보았듯 ODA의 주요 원칙 중 하나로 국제인권기준을 언급하고 있다. 한국의 국제개발협력기본법도 3조(기본정신 및 목표)에서 개발도상국의 "여성ㆍ아동ㆍ장애인ㆍ청소년의 인권향상"을 언급하고 있지만, 인권 향상의 대상을 여성과 아동, 장애인, 청소년으로 한정해 성소수자, 소수민족, 선주민 등 인권 침해가 종종 일어나는 집단을 배제하고 있다. 다만 KOICA가 ODA 사업의 환경, 사회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근 입안을 예고한 KOICA의 환경 사회 세이프가드 이행지침은 '원주민'과 소수민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개발협력기본법 4조(기본원칙)에선 국제인권기준뿐 아니라 인권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둘째는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다. ODA책무성법은 2조 1항(목적)에서 캐나다의 ODA는 민주주의의 증진을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한국의 국제개발협력기본법과 그 시행령, 그리고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엔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이 없다.
마지막은 인적 재난이다. 한재광 대표는 발표에서 ‘해외긴급구호에 관한 법률’이 미얀마 군사 쿠데타와 같은 인적 재난, 취약국의 만성 재난 등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하며, 한국 정부가 2015년 작성한 ‘우리나라의 인도적 지원전략’과 2019년 작성한 ‘우리 정부의 인도적 지원 전략 개정안’에는 인적 재난과 만성적 재난도 인도적 지원의 정의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런 내용을 법률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ODA책무성법은 인적 재난(artificial disaster)도 ODA의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캐나다 ODA책무성법의 적용과 한계
ODA책무성법의 내용은 이상적이지만 세부 내용은 너무나 간결해서 그 적용 방안이 궁금했다. 적용 방안에 대해 알기 위해 캐나다 외교부(Global Affairs Canada)가 외교부에 재정 지원 신청을 하는 단체들을 위해 준비한 ODA의 세 가지 원칙에 대한 안내서와 캐나다의 국제개발협력 협의체(한국의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와 비슷한 단체)인 Cooperation Canada(구 CCIC)에서 ODA책무성법의 시행을 주제로 2010년 발간한 "A Time to Act"의 서문과 1장 '변화를 위한 의제-ODA책무성법 시행하기', 그리고 ODA 책무성법 10년을 돌이켜본 오타와 대학교 Stephen Brown 교수의 'ODA책무성법 10년: 업데이트가 필요한 때'를 살펴보았다.
빈곤 감소에 기여하고 가난한 사람의 관점을 고려하기
빈곤 감소 기여에 대한 캐나다 외교부의 안내서는 빈곤의 다면성을 강조한다.
빈곤은 다면적이다. 여기엔 부족한 소득, 제한적인 보건·교육·주거·필수 기반시설 접근성, 정치·사회적 배제, 개인적 불안정, 인권 침해, 불평등이 포함된다. 이런 빈곤의 다양한 면은 서로 연결되어있고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집단은 다방면의 문제를 동시에 겪고 있다. 예를 들어 취약하거나 분쟁의 영향을 받는 공동체에 사는 사람은 기초보건과 교육 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고 주거 환경도 좋지 않으며, 취업기회도 없다. 그리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주요 자원에 대한 통제권도 없다. 빈곤의 다양한 면은 여성과 남성, 여아와 남아에 각각 다르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다면성 때문에 빈곤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속가능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며 빈곤 감소를 위한 캐나다의 주제별 우선순위 다섯 개(식량안보, 아동과 청년,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 민주주의, 안보와 안정)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캐나다 외교부에 제안하는 ODA 사업이 빈곤 감소 기여라는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예시 질문을 소개하며, 아래 질문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다면 이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질문1. 제안 사업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다면적 빈곤을 겪고 있는 개인, 가족, 혹은 집단의 복지를 향상할 것으로 예상되나요?
질문2. 제안 사업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다면적 빈곤을 겪고 있는 공동체와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나요?
질문3. 제안 사업이 믿을만한 파트너 국가나 공동체의 빈곤감소전략에 부합하나요?
질문4. 제안 사업이 지속가능발전이나 빈민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빈곤 감소를 주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지원합니까?
빈민의 관점을 고려한다는 원칙에 대한 안내서에 따르면 빈민의 관점을 고려한다는 것은 ODA 사업에 가난하고 차별받는 집단의 우려와 수요, 우선순위가 포함되도록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캐나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과 차별받는 사람, 집단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참여적 방법을 통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직접적 방법 혹은 빈민과 차별받는 집단을 대변하는 시민사회단체와 협업하여 사업을 수행하는 간접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빈곤 감소에 대한 안내서와 동일하게 빈민 관점 고려에 대한 안내서도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질문1. 잠재적인 수혜자와 이해당사자가 자신의 수요와 계획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그 내용이 고려되었다는 것이 사업 문서에 명확히 나오나요?
질문2. 사업을 수행하는 시민사회 혹은 기타 집단이 빈민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할만한 역량과 신뢰성, 의지를 가지고 있나요?
질문3. 사업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국가 빈곤감소전략, 분야별 전략 혹은 지역 발전 계획 등과 연계되어있다면, 해당 전략의 수립을 위한 협의 과정에 빈민의 관점이 반영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ODA책무성법과 외교부의 안내서에 대해 오타와 대학교의 Stephen Brown 교수는 표현이 모호하고 해석이 느슨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부가 이런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다며 2014년 수립된 Global Market Action Plan을 예로 들었다. 이 계획에는 빈곤 감소와 빈민 관점 고려의 원칙에 위배되는 "개발 프로그램을 캐나다의 무역 이익을 증진하는데 활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기
ODA의 책무성법의 핵심은 인권이다. 캐나다 ODA가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여 ODA 사업이 인권에 기반하여 기획되고 수행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Cooperation Canada의 Time to Act에서도 분석하듯 인권 침해는 빈곤의 문제이자 결과이며, 빈곤이 곧 인권 침해이기 때문에 인권 접근(Human-rights Approach/HRA)이 ODA책무성법이 규정하는 ODA의 세 가지 원칙에 부합하는 사업을 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국제인권기준 부합 원칙에 대한 안내서는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원칙이 인권에 대해 최소한 'Do no harm'(해를 끼치지 않는다)하는 것이라며 ODA 사업이 상대 국가나 공동체의 인권을 침해해선 안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일부 프로그램은 'Do no harm'을 넘어 개발도상국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캐나다 외교부가 제시하는 인권의 세 가지 측면은 아래와 같다.
- 시민·정치적 권리: 표현의 자유, 평화적 집회의 자유 등
-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교육, 보건, 노동, 농업, 사회보장제도 등을 통한 권리의 실현
- 평등과 비차별: 젠더, 나이, 인종, 민족, 언어, 장애, 종교, 정치적 견해, 출신지, 재산, 성적 지향 등으로 인해 개발 사업의 혜택에서 무시되거나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전통적으로 차별받는 집단을 위한 적극적 우대 활동(Affirmative action)이 다른 집단의 권리 실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권장하고 있다.
비차별(non-discrimination)과 관련해 A time to Act에 흥미로운 내용이 하나 있는데, 캐나다 ODA는 가장 차별받는 사람들의 필요와 환경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며 기초 보건 서비스 등에 대한 사용료처럼 차별을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피해야 한다는 예시를 들고 있다. 다른 국제개발협력 사업에선 현지의 주인의식이나 지속가능성을 이유로 개발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의 사용료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여기서는 사용료의 존재가 사용료를 낼 수 없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차별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어 흥미롭고 앞으로도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라 생각했다.
안내서는 각 사업이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질문1. 제안 사업 활동이 시민권이나 정치적 권리 유린에 직접적으로 기여진 않나요?
질문2. 제안 사업이 사회적, 경제적 혹은 문화적 권리를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나요?
질문3. 제안 사업이 사람들이 권리를 실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차별하는 활동을 지원하진 않나요?
이 외에도 안내서에는 캐나다가 어떤 국제인권협약에 가입되어있는지, 인권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인권 침해를 예방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A time to Act는 실제 ODA책무성법 적용에서 인권은 'Do no harm'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을 넘어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경찰과 교도관의 임금을 지원하는 내용이 포함된 ODA 사업을 예시로 들며 이 사업을 결정하는 과정에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논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캐나다 ODA책무성법의 적용 문제: 딱 한번 적용될 뻔 했던 법
2018년 ODA책무성법 10주년을 맞아 오타와 대학교의 Brown교수가 쓴 글에 따르면 ODA책무성법은 2008년 제정된 뒤 2011년 딱 한번 법정에서 적용된 적이 있다고 한다. 2011년 에티오피아에 수감된 캐나다 시민 Bashir Makhtal에 대한 법적 공방에서 활용되었는데, Bashir Makhtal은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소말리아에 살다가 1994년 캐나다 시민이 된 사람으로 2006년 소말리아로 출장을 갔다가 테러조직 알샤밥(al-Shabaab)의 세력 확장을 피해 케냐로 갔다가 체포되어 에티오피아로 이송되었다. 그의 혐의는 에티오피아 내 소말리 지역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반군 세력을 도왔다는 것이었고, 2009년 에티오피아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Makhtal의 가족과 변호인단은 그에 대한 혐의가 부당하고 에티오피아에서 진행된 법적 절차에서 인권침해가 있었다며 ODA책무성법을 인용, 캐나다의 ODA가 에티오피아에서 "압제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며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관련기사) 하지만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Makhtal은 2018년에서야 겨우 석방되어 캐나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꼭 법정에서 다뤄져야만 이 법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법의 내용에 반하는 국제개발활동이 법적으로 규제된 경우가 없다는 것은 법 적용이 느슨하게 이루어지고 있거나, 법 내용이 모호하여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등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0년 동안 딱 한번 적용될 뻔했을 정도로 ODA책무성법은 이상적인 내용에 비해 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ODA책무성법이 더 잘 활용되고, 인권을 캐나다 ODA의 핵심으로 두기 위해 캐나다의 학계와 시민사회 등은 1) 인권 기준을 'Do no harm'보다 적극적인 보호와 증진의 관점에서 적용할 것, 2) 법률이 정하는 바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것, 3) 실질적 협의를 위해 명확한 주제를 선정하고, 사전 준비기간을 충분히 가지며 1회성 협의는 지양할 것, 4) 수원국 혹은 참여자의 이의제기를 위한 체계를 갖출 것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캐나다의 ODA책무성법에 대한 제언이지만, 한국의 ODA 책무성 증진을 위한 제언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나가며
ODA책무성법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 사례를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제도 변화를 촉구하는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법의 활용에 대해 알아갈수록 기대보다는 아쉬움을 더 많이 느꼈다. 무엇(인권, 빈민 관점)을 원칙으로 누구(납세자, 의회, 사업 참여자, 국제사회)에 책무성을 가져야 한다는 아름다운 내용은 있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사업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 이 원칙을 활용하고 각자의 책무성을 다할 수 있을지, 혹은 상대방에게 책무를 다할 것을 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내용은 법에 없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도 충분히 뒤따르지 않았다.
인권, 민주주의, 요즘 뜬다는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기후위기 대응 등 세상엔 이미 아름다운 목표와 원칙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개념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포장지만 갈아 끼운 경우가 많다. 어떤 국제개발협력 단체는 원래 하던 활동은 그대로 둔 채 말만 인권기반접근의 용어를 빌리고, 어떤 기업은 근본적인 체질 계산 없이 일회성 행사와 언론 활용을 통해 EGS를 외치며, 어떤 정치인은 더 큰 경제를 외치며 정책 이름에 '그린'을 붙인다. 캐나다에서 ODA책무성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그중 더 힘이 많은 이들은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아름다운 구호를 선점하는데 만족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국제개발협력이 양적 성장과 국익을 넘어 인권과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선 법에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실천과 감시라는 생각이 든다. 과대포장의 범람으로 사람들이 질리기 전에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위협받기 전에,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도 저 하늘에 있는 인권과 민주주의, 기후위기 대응을 우리의 현장과 삶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 사업을 기획할 때 사람들과 어떤 태도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지, 사업을 진행할 때 사업과 관련된 모임(주민모임, 협동조합, 사업 운영 조직 등)이 민주적인지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더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촉진할지, 사업을 평가할 때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 그리고 환경에 대한 영향을 어떻게 조사하고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지, 정부와 기업 주도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해외 개발원조 사업을 어떻게 기획단계에서부터 감시하는지, 그 외에도 더 많은 '어떻게'가 논의되어 가이드라인이나 체크리스트 같이 우리의 실천에 도움이 되는 결과물로 나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