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바리 Feb 11. 2023

한국이웃사랑회, 한국선명회 그리고 인도지나

[한국개협 요모조모(1)] 1997년의 이름들

력 요모조모(1) 한국이웃사랑회, 한국선명회 그리고 인도지나: 1997년의 이름들


"한국이웃사랑회", "한국선명회", "인도지나". 1997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발간한 <지구촌의 한국인들: 민간단체의 해외원조활동>에서 이 단어들을 만났을 때, 알듯 말 듯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전글: 국 력 요모조모(0) 한국 국제개발협력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아쉽고 궁금해

https://brunch.co.kr/@theafricanist/195


이름도 이름인데, 왜 정부기관인 KOICA는 이런 책을 냈을까? 1995년 민간협력과를 신설하고 NGO 사업을 지원하며 본격적으로 NGO와 협력을 시작한 KOICA의 신기봉 총재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선진원조국"들이 효율적인 원조활동을 위해 NGO와의 협력을 확대하는 추세에 따라 KOICA도 NGO 사업 지원을 확대해 나갈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국민에게 NGO의 활동을 소개해 인식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이 책을 발간한다고 썼다. 


<지구촌의 한국인들> 표지



한국이웃사랑회


분명 누군가는 '한국 이웃 사랑해~'라고 농담했을 것 같은 "한국이웃사랑회"는 아래 영문명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의 "굿네이버스"다. 1991년 3월 28일 설립자이자 전 회장, 현 이사장인 이일하 이사장을 포함한 8명의 창립멤버와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출범한 한국이웃사랑회는 2002년 8월 1일부로 영문명으로만 쓰던 굿네이버스를 단체의 공식 명칭으로 변경했다. 


설립 직후 국내 아동지원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굿네이버스는 1992년 방글라데시 구호개발사업을 시작으로 해외 지원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 책에는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1994.4.7.-7.15.) 직후 콩고민주공화국(당시 국명은 자이르(Zaire))의 고마(Goma) 지역에서 르완다 난민을 지원하는 사업과 케냐 나이로비의 큰 슬럼 지역인 코로고쵸(Korogocho)에서의 교육사업이 주로 소개되었다. 

굿네이버스 홈페이지 캡쳐

르완다 제노사이드에 대해 요즘은 보통 "극단주의 후투 세력이 소수민족인 투치 민족을 학살"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르완다 정부도 "1994년 투치 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1994 Genocide Against the Tutsi)"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한국이웃사랑회에서 르완다 난민구호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후투와 투치의 관계가 반대로 서술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오랜 종족 갈등과 권력투쟁이 있는 르완다에는 1994년 4월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내전으로 불과 3개월만에 750만 인구중 50만명의 학살과 2백만명의 난민, 25만명의 고아가 발생되었다. 아무런 대책없이 200만명의 난민들이 르완다 인근 지역인 자이레지역 등으로 투치족의 학살을 피해 피신하였으나 먹을 물도 음식도 의복도 기거할 곳도 없이 막막한 난민생활도 인하여 질병과 보호능력이 약한 어린이부터 시작하여 노약자 등 수만명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p.276)


투치족의 학살을 피해 자이르 고마로 도망친 (후투) 난민이라는 서술이 등장하는 이유는 지금도 정권을 쥐고 있는 폴 카가메(Paul Kagame)가 이끌던 투치 반군, 르완다 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 RPF)이 제노사이드를 종식하고 내전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 후투 민족에 대한 RPF의 폭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현 르완다 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제노사이드 부정론자(Genocide Denier)'들의 주장이라며 거짓이자 분란을 일으키는 목적의 음모론으로 보고 있어 관련 논의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RPF의 후투 민족 살해에 대한 내용은 Christian Davenport와 Allan C. Stam의 2009년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Davenport, C. and Stam, A. (2009) What Really Happened in Rwanda?: https://psmag.com/social-justice/what-really-happened-in-rwanda-3432


각 사업의 소개글은 사업의 요소와 논리, 양적인 성과를 소개하기보다는 사업지에서 목격한 광경에 대한 묘사와 거기서 받은 느낌, 사람들의 이야기와 개별 사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1997년에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1994년 8월 서울을 떠난 지 4일 만인 15일 오전에 난민촌에 도착한 우리 긴급구호 의료팀이 진료를 시작하자마자 1백명이 몰려들었고 오후 6시가 넘어 어두컴컴해진 뒤에야 진료를 마칠 수 있었다. (중략) 현지에 도착해서 참기 어려웠던 것은 비위생적인 주변환경과 냄새였다. 씻을 물도 없고 창궐한 질병탓에 모든게 지저분했고 역겨운 냄새가 풍겨나왔다. (p.277)

한번은 소를 한 마리 잡아 전교생과 교사 1,500명이 잔치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시간만은 난민촌 안에서의 생활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삶의 현장이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소망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UN에서 나누어준 기름통을 잘라 비닐로 씌운 장구를 만들어 두들기고 나무를 깍아 만든 기타로 줄을 퉁기며 춤추고 노래하던 난민촌 학교의 아이들은 어느 다른나라의 아이들과 다름없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p.278)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주민들의 오해를 불러일으면 사업 전개 자체가 불가능 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웃사랑회는 이 부분에서 매우 조심스럽고 치밀한 계획으로 주민들과 마찰없이 사업을 시작, 전개할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고로고쵸에서 오래동안 빈민들을 위해 일해 온 다른 단체들을 방문하여 주민들의 특징과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자세히 들었다. 예를 들어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는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의 근처에 주민 상담소로 쓰기에 좋은 장소가 있었지만 같은 사람들로 오해받을까 봐 피하였다. (p.286)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그리고 지구촌나눔운동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1989년 창립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1995년 베트남 하떠이성에서 첫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경실련이 베트남을 첫 해외사업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우리와 근접한 최빈국이지만 각종 조건에 비추어 원조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 한국이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베트남전에 참가하여 남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관계에 있고, 사회주의경제 체제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어가는 베트남에서의 개발사업 경험이 향후 북한에서의 개발협력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경실련 내에서 경제정책 조사, 연구 및 홍보와 더불어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담당하는 경제정의연구소가 담당한 '베트남 하따이 개발사업' 1단계(1995.4.-2000.12.)의 주요 내용은 직업훈련학교 건립과 운영부터 영농자금 대출 등의 농촌개발사업, 의료봉사와 문화교류 등의 민간교류까지 다양했다. 


이 사업은 이후 IMF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중단위기에 처했다가 1998년 설립된 지구촌나눔운동에 인수되어 '한베협력센터' 사업으로 이어졌다. 지구촌나눔운동은 1998년 12월 10일 창립되었는데, 한베협력센터 준공식은 1998년 12월 16일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베트남 한베협력센터 준공식 사진. 가운데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흰옷)의 모습도 보인다. Photo: 지구촌나눔운동 10주년 자료집


창립 당시 지구촌나눔운동의 이사장은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을 지냈던 국내 에큐메니칼 1세대 운동가였던 강문규 아시아시민사회연구원 원장이 맡았고, 경실련 초대 사무총장인 서경석 목사가 부이사장을 맡았으며, 현재 지구촌나눔운동 이사장을 지내고 있는 경실련 출신의 김혜경 아태시민사회포럼 사무국장이 사무총장을 맡은 것으로 보아 창립 당시 이미 경실련의 사업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지구촌나눔운동의 초기 역사에서 에큐메니칼운동-경제정의 운동-국제개발협력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분석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경실련의 '베트남 하따이 개발사업' 사업 소개에는 이후 지구촌나눔운동에서도 이어지는 활동(영농자금 대출)도 있었고, 당시 국제적인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거나 국내 시민사회운동과의 연계를 고려한 내용도 많다는 점도 인상 깊다.


기존의 직업훈련학교가 대개 학교건축 만으로 종결되거나 또는 기술훈련만으로 끝나는 등 사후관리가 되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본 직업훈련학교는 목공기술의 기초부터 기계조작, 생산, 판매까지 교육하며, 생산제품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학교를 영속적으로 운영하는 최종단계까지를 지원할 계획이다. (p.99)

한국의 가구업체에서 이들(졸업생)을 고용하는 문제를 타진해 본 결과 국내업체의 좋은 반응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보다 발전된 기술과 시장경제를 배우고 2-3년간 기초적인 자본을 형성한 뒤 귀국하여 베트남 내에서 자기사업체 운영을 통해 자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베트남의 목재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협력하여 한 지역을 발전시키는 스페인의 몬드라곤 공동체의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p.100)

신용금고사업은 적은 자본으로 여러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개발사업 중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의 하나이다. 경실련에서는 1995년 9월에 하따이성 푹라마을에서 시범적으로 14가구를 선정하여 양계에 대한 지도와 함께 가구당 약 20-40만원의 영농자금을 대출해 주었다. 대출금은 2개월마다 회수하고 재대출하는 방식으로 수혜기간이 1년이 지나면 그 동안의 수익금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된다. (p.100)

경실련 기독교청년협의회에서는 '10년후 만불후원자되기' 캠페인을 구상 중에 있으며, 대학생들을 다가올 방학동안에 자원봉사를 떠나기 위해 베트남에 대해 공부하고 틈틈히 아르바이트로 여비와 선물비를 마련하고 있다. (p.101)



한국복지재단



한국복지재단, 인도지나, 둘 다 생소한 이름이라 구글에 검색을 해보았다. 한국복지재단은 지금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고, 인도지나는 인도차이나였다. 


어린이재단은 1948년 미국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의 한국지부 설립에서 시작되어 1980년대 미국기독교아동복리회에서 독립해 한국어린이재단이 되었고, 1994년 사회복지 사업의 범위가 어린이뿐 아니라 장애인과 노인까지 확장되면서 한국복지재단으로 명칭을 또 한 번 변경했다가 2008년 창림 60주년을 맞아 지금의 어린이재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어린이재단 앞에 붙는 '초록우산'은 2010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5년 당시 한국복지재단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아동 지원 사업을 하며 해외사업을 시작했고, 2002년에는 국제어린이재단연맹(ChildFund Alliance) 회원국으로 가입하며 해외 아동 지원 사업을 본격화했다. 미국기독교아동복리회의 한국전쟁 고아 지원 사업에서 출발한 단체라는 특성의 영향인지 사업 소개에 "6.25 동란 이후 어려웠던 시기에 많은 외국의 민간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경험"과 같은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선명회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 전쟁에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밥 피어스 목사는 한국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뒤,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1950년 국에서 월드비전(World Vision)이란 민간단체를 설립했고, 1953년엔 한국 지부인 한국선명회(World Vision Korea)를 설립했다. 설립 초기엔 전쟁의 피해를 입은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보호사업, 보건사업, 교육 사업 등을 주로 했고, 70년대부터는 활동 영역을 넓혀 사회복지관 운영이나 지역개발사업 등을 하는 종합 복지 기관이 되었다. 


한국 선명회는 1991년, 국제 월드비전의 후원을 받는 수혜국에서 스스로 국내 사업비를 충당하는 후원국이 되었고, 같은 해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 치타공 지역의 피해복구 지원에 참여하며 해외 사업도 시작했다. 그리고 1998년, 국제 월드비전 총회에서 각 회원 기관 이름을 월드비전으로 통일하기로 결정하며 1999년 한국 선명회도 월드비전으로 법인 이름을 바꿨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업은 '케냐 와지르 지역 구호사업'인데, 이 사업은 케냐 월드비전의 요청으로 한국 선명회가 1995년부터 지원하기 시작한 사업이라고 한다. 이 사업은 반-사막지역인 와지르에서 주민 식량 안보 보장을 위해 식수개발, 농업개발(야채/과일 재배 교육), 초등교육지원, 보건소 운영, 부업을 통한 소득증대 지원, 그리고 사막화 방지를 위한 나무 심기를 하는, 요즘에도 종종 볼 수 있는 종합 농촌개발과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월드비전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국 월드비전의 와지르 지원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https://my.worldvision.or.kr/hope/place_projectSummary.asp?information_seq=20&search_business=114


한국선명회의 사업 소개 내용에는 후원자에 대한 이야기와 종교적 이야기가 많은 점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무심히 쓴 돈 2천원으로 할 수 있는 엄청난 사업을 생각해 보자. 이 돈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 8명에게 유니믹스라는 고단백 영양식을 먹일 수 있으며, 실명위기에 처한 40명의 어린이에게 고단위 비타민A를 줄 수 있다. (p.254)

다음날 아침일찍, 와지르행 경비행기를 탔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MAF(Missionary Aviation Fellowship)라는 국제 기독교 항공 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비행기였는데 NGO직원들에게 탑승 우선권을 주고 있었다. (p.260)

마치 2000년전의 구약 성경시대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우리가 탄 랜드로바 짚차 뒤에 앉아 있는 2명의 무장한 군인들이 우리 일행을 소말리아인들의 약탈에서 보호하기 위해 타고 있다는 설명을 듣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p.261)

선명회 직원의 사명은 선명회라는 조직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에게 지구촌 현실을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해 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그들이 개인적인 사건으로 응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한 그레함 어바인 국제본부 전 총재의 말이 생각났다. (p.264)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점은, 지금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는 현지 월드비전 파트너 중심의 사업운영 방식에 대한 언급이었다. 이 당시 왜 현지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했는지 설명하는 대목은 월드비전과 같은 국제 파트너십 소속 기관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각국의 현지 지부가 설립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많은 국내 단체들이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선명회 사업은 후원국 선명회 직원이 수혜국 사업장에 일일이 파견되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과 국제본부의 직원으로 구성된 수혜국 선명회 직원에 의해 지역사회내의 절대빈곤층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과거에 한국선명회가 후원국선명회의 지원을 받으며 모두 한국사람으로 구성된 직원에 의해 한국현실에 맞는 복지사업들을 활발히 진행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후원국은 수혜국에서 보내오는 정기적인 사업보고서를 받으며, 사업장에서 필요한 모든 행정지원을 하고 정기적인 사업장 방문을 통해 사업의 추진을 관리하고 있다. (p.251)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복지재단, 한국이웃사랑회, 한국선명회, 그리고 다른 단체로 계승된 경실련의 국제개발협력 이야기를 읽다 보니 1997년, 그때 그 시절의 활동의 근간이 되었던 마음과 생각, 그리고 글에서 느껴지는 단체의 성격, 사업 스타일이 지금 그 단체들의 활동과 겹쳐 보이는 것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그리고 갈수록 더 정형화되고, 내용보다 시각적인 것에 더 치중하고, 양적 지표를 더 강조하는 것 같은 사업보고서나 사례 이야기와 비교하면 정말 '날것'의 사업소개였는데, 오히려 그래서 감정과 주관이 뒤엉킨 글 뒤에 있는 활동가가 느껴지는 듯 생생했다. 




<지구촌의 한국인들: 민간단체의 해외원조활동>은 디지털화된 파일은 없는 것 같지만, 몇몇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이 종이책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 남산도서관, 영등포도서관, 종로도서관이 이 책을 보유 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