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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May 24. 2019

상냥하고 평범한 파괴자들

[책 리뷰] 상냥한 폭력의 시대 (2016)

하루는 사당에서 대학 동기들과 술 한잔 하는데, 친구가 요즘 읽는 책이라며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그 친구의 취향은 항상 좋았다. 그런데 그날은 이 책이 정이현 소설가의 책인 줄 모르고 넘어갔다. 대신 표지가 예쁘다는 말만 열 번쯤 한 것 같다. 표지엔 파스텔톤 색으로 된, 네모반듯한 아파트가 그려져 있는데,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이런 네모 반듯한 아파트가 오히려 '정겨운' 풍경이라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주 상냥한 글씨체에다가 약간 유광으로 처리된 제목 '상냥한 폭력의 시대'도 마음에 들었다. 표지 뒤편에 적힌 짧은 문구도 그날은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럴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에 대하여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2016.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닳을 만큼 닳아 무덤덤하고 '착하'고 참 '보통'사람들이다. 그건 전혀 나쁜 거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친척 결혼식에 따라온 동거인을 가족들에게 소개해주지 않는 사람인가하면, 고등학생 딸이 미숙아를 낳자 아기의 생사가 걸린 수술 결정을 일부러 미루는 딸의 엄마이기도 하고, 거액의 유산을 받을 수 있다는 이복형의 제안에 아버지를 살해하는 계획에 동참하는 사람과 그의 애인이기도 하고, 남을 아무렇지도 않게 경멸하고 내려보는 고학력 고소득 사람이기도 하다. 언뜻 매우 악해 보이지만, 이 사람들 하나같이 그런 행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냥'하게 저지르며 산다. 그리고 딱히 그 행위로 벌 받지도 않고, 이런 사람들 모여사는 그 세상에도 별일 안 생긴다.


우리는 이렇게 선도 악도 단죄도 구원도 없이, 그저 파국을 기다리며, 사회적 욕망만을 충족시키며 버티는 삶을 살거나, '열일곱 살짜리 알다브라코끼리거북과 고양이 모양 헝겊 인형을 가진 마흔 살 남자'처럼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정이현 작가가 지금의 인간군상을 정말 잘 그려냈다. 내 삶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개인적으론 후자의 삶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7편의 단편소설들 다 좋았다. 한편 한편 여운이 길어 빨리 읽을 순 없었지만, 어제, 아레, 오늘 많은 시간을 들여 다 읽었다. 책 마지막 부분에 실린 작가의 말 까지도 좋고 인상 깊었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나와 빼닮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쓸 수 밖에 없다. 소설로 세계를 배웠으므로, 나의 도구는 오직 그뿐이다.




(이 글은 2016년 11월에 작성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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