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
가을의 끝자락,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3일 동안 손주들을 돌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아이들이 얼마나 훌쩍 자라 있는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요리를 하기 위해 스스로 장을 보고 손질을 한 뒤, 준비를 마쳐 학교에 가는 큰 손주. 곧 고등학생이 될 나이에, 이제는 나보다 훌쩍 큰 키와 단단한 어깨를 지닌 채 마음까지 성큼 성장해 있었다.
둘째 손주는 자기 일은 물론 동생까지 살뜰히 챙기고, 집안의 소소한 일도 척척 해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빨래를 분류해 세탁기를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집안의 ‘든든한 손’이 되어가는 변화가 흐뭇하기만 하다.
막둥이는 여전히 장난기 많은 막내지만,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챙긴다.
어린 티를 조금씩 벗고 의젓한 기운까지 드러내는 모습이 참 기특하다.
이렇게 바라보니, 이제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예전만큼 필요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의젓해졌다고도, 철이 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자란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 한편에는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왔음을,
그리고 그만큼 나 역시 조용히 나이를 먹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동시에,
아이들이 너무 빨리 자라지 않기를,
일찍 철들지 않기를 바라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가을 끝의 스산한 바람과 함께 살며시 자리한다.
가을의 쓸쓸함이란 그런 것이다.
불현듯 찾아와 마음의 문고리를 살짝 돌리는 계절.
하루는 맑고 따뜻한데, 다음 날엔 갑작스레 차가운 바람이 불며 마음속 어딘가를 조용히 울린다.
마치 오래된 서랍이 스스로 열리고, 그 안에 묵혀 있던 감정들이 한 겹씩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다.
나뭇잎이 마지막 빛을 힘껏 발하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쓸쓸함이 꼭 슬픔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건 잃어버림의 감정보다는, 다 채워낸 뒤의 고요함에 가깝다.
여름의 무성함을 견디고 뜨거움을 지나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고르는 계절, 그 고요한 여백이 바로 가을만의 아름다움이다.
사람의 마음도 가을을 닮았다.
지난 한 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둔 순간들을. 이 계절이 되면 조용히 꺼내어 들여다보게 된다.
기쁜 일도, 아픈 일도, 흐릿하게 남은 흔적들까지
서늘한 바람 앞에서는 자연스레 한 톤 낮은 색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게 낮아지고 엷어진 빛깔들이 모여 마음을 은근히 흔들고,
때로는 묘하게 차분하게도 만든다.
어쩌면 그 미묘한 흔들림과 차분함이 바로 우리가 ‘스산함’이나 ‘쓸쓸함’이라 부르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을의 스산함과 쓸쓸함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비워낸 자리마다 새로운 온기가 들어설 틈을 만들어 준다.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가 더 깊은 뿌리를 준비하듯,
우리의 빈자리도 다음 계절을 맞을 작은 여유를 품게 한다.
그래서 나는 가을만큼 솔직한 계절도 없다고 생각한다.
숨기지 않고 흔들리게 하고,
감춰둔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고,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게 만든다.
몹시 가을을 타면서도 그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쓸쓸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오는 따뜻함이 잔잔히 내려앉는다.
그건 누구에게서 건네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조용히 내어준 온기다.
가을의 쓸쓸함은
사라짐과 채움 사이, 상실과 회복 사이에 놓인
아주 아름다운 쉼표 같은 감정이며,
스산한 바람은 그 쉼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다.
비워진 자리마다 마음을 흔들고, 잠시 멈춰 숨을 고르게 하며
새로운 온기가 스며들 틈을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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