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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Apr 09. 2022

'파친코', 비극적인 시대와 여성

런던의 '2차 대전 여성 기념비', '배틀필드 5' 그리고 선자

런던을 둘러보는 일은 생각보다 발품과 시간이 들지 않는다. 서울로 따지면, 광화문, 종로, 남대문, 서울역 정도의 도심 공간 안에 주요 랜드마크와 볼거리가 밀집됐기 때문이다. 걸어서 이틀이면 런던 중심가를 구석구석 살펴보기 충분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과 의회가 있고 세계 최초의 신호등이 있었던 교차로에서 트라팔가 광장까지 이어지는 화이트홀 길을 가이드님과 함께 걸었을 때였다. 총리 집무실인 다우닝가 10번지부터 주요 정부 관청이 가득해 런던의 가장 핵심이 되는 길에 들어보지 못했던 기념비가 도로 위에 큼직하게 있었다. 역사적인 전쟁영웅들의 동상들이 늘어선 분위기와 사뭇 다른 느낌이라서 사진을 열심히 찍고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세계 2차 대전에 기여한 여성들을 기리는 기념비였다. ‘The Women of World War II’라고 적혔으며, 여느 기념비처럼 인물이 두드러지는 동상이 아니었다. 여성들이 2차 대전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업무를 대표하는 복장과 제복 17벌이 벽면에 걸린 모습으로 꾸며졌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여성들의 참전 규모는 적지 않았다. 64만 명이 군에 투입돼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고, 5만 5000명은 총기를 갖추고 복무하거나 방공방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역사는 전쟁을 기록하고 기념하면서 여성을 다소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기념비 설립을 추진하고 중점적인 역할을 했던 부스로이드 남작 부인은 “기념비는 여성들의 작업복을 의미하고 전쟁이 끝나는 날 얼마나 그 작업복을 빨리 벗어 던지고 남성에게 그 공로가 돌아가게 됐는지를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2005년 7월 2차 대전에 군인으로서 참전한 경험이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기념비를 공개했다. 런던 상공에는 여성 파일럿들이 모는 전투기와 군용 헬기가 기념 비행을 했다.



2018년 출시된 게임 ‘배틀필드 5’의 여성 캐릭터 등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고증 논란도 생각난다. 세계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가 비중 있게 나오면서 역사 고증에 문제가 크다면서 비판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 게임이 역사를 100% 그리거나 반영한 다큐가 아님에도 여성이 전쟁 일선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게임적 설정에 핍진성이 떨어진다며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세계 2차 대전에 착안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나 ‘조조 래빗’에도 크고 작은 고증 오류가 있어도 영화적 허용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참전했던 여성 군인의 기록을 극대화해 게임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큰 논란이 됐다. 게임의 흥행과 재미를 떠나, 전쟁에서 여성은 참여와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일이고 불문율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전쟁을 비롯한 인류의 비극적인 시대는 여성의 역할과 저항을 유독 더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과 함께 가장 비극적이었던 시기인 일제강점기도 비슷하다. 무장 투쟁의 선두에 서고, 높은 교육 배경으로 지식운동을 이끈 이들을 중심으로 교과서에 이름을 올리고 이야기가 구전된다. 교과서에 기록된 주역들과 함께했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몫을 다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의식에 녹아들 기회가 아쉽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 ‘파친코'와 이를 각색한 드라마 '파친코'가 그리는 스토리가 인상적이고 새롭고 산뜻하다. ‘파친코'는 부산 영도에서 부침 많던 가족사를 바탕으로 특출날 거 없지만 부모님의 사랑으로 단단하게 성장한 ‘선자’를 중심으로 한미일을 아우르는 4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시대가 어떻게 사람들이 처절해지는지 그린다. 특히 여성의 삶이 어떻게 위축되고 억압받으며 불행한 운명을 끌어안아야 하는지를 상세히 그렸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어머니가 조선 여성으로의 숙명을 따르기 위해 혼인과 출산으로 삶을 이어오며 선자를 낳았다. “계집애는 끼니만 챙길 줄 알면 된다”라는 어머니의 정언명령 아래 글도 배울 수 없었던 선자는 유부남임을 감추고 다가온 남성과 임신을 하게 된다. 사생아 자식을 낳을 수 없어 다른 남성과 급작스런 혼인을 올리고 그를 따라 일본으로의 이주한다. 전통적인 여성상이란 굴레에 더해 식민지인으로서 일본 본토에 살아가며 숱한 차별과 역경을 겪는다.


4화에서는 인상적인 장면이 두 가지 등장한다. 선자와 부산항에서 어머니와 눈물 흘리며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시집살이와 타지살이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과 당부를 해주는 장면은 극의 백미다. 다시 볼 수 없는 작별일 수 있는데도 지극히 현실적인 당부와 다그침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뭉클하게 한다. 

오사카로 가는 배 안에서 당대 최고의 조선인 가수(이지혜 뮤지컬 배우 분)의 공연은 한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가수는 헨델의 소프라노 아리아 ‘나를 울게 하소서'를 부르다 돌연 공연을 멈추고, 춘향가의 한 대목인 ‘갈까부다’를 열창하며 일본 고위 공직자들의 분노를 사고 자결한다. 성적인 희롱과 함께 교차 편집으로 10억 엔이라는 구체적 액수로 보상 문제를 일본인과 미국인과 협상하는 장면을 배치한 것 그리고 가수가 부른 게 춘향이란 인물이 부른 노래인 것을 통해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를 비유했다고 추정된다. 한편 조선인 가수가 일제강점기 당시 ‘사의 찬미'로 유명세를 떨친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는 이야기도 있다. 윤심덕은 한일을 오가는 배에서 실종됐으며, 사랑했던 연인과 함께 자살했다는 추정이 지배적이지만 죽음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어두운 시대에서 영웅과 위인과 위인을 기리고 기념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시대를 구성하는 개인의 삶,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위인의 생애와 업적보다는 그 시대의 그늘에서 살아갔던 소시민들과 가깝다는 것을 고려하면, 암울한 시대 속 각 개인의 삶 역시 기리고 되돌아보는 것도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조언과 당부를 해주지 않을까. 


그 당시 사람들이 생애 전체에 걸쳐 겪어야만 했던 비극은 우리의 역사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역사니까.



애플TV+의 드라마 ‘파친코’의 오프닝 영상이 드라마 분위기와 대비돼 눈길을 끌었다. 즐거움과 행복이란 감정과 거리가 먼 드라마 등장인물들이 밝게 웃으며 춤을 추는 모습이다. 총괄 프로듀서 테레사 강 로우는 “시대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며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행복을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하루하루 먹고살고 생존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그 시대 사람들, 우리의 조상과 이웃을 기리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 


‘파친코'는 그 당시 사람들의 거룩함과 위대함으로 점철된 시대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 사람들의 일생의 숭고함과 소중함을 그린 기록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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