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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23. 2023

인민군으로 차출

할아버지 회고록 11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인민군으로 차출



 추수를 앞둔 가을이었던가 보다. 청년들 면 분주소에 모이란다. 기피하면 반동분자로 취급되기 때문에 순응해야 한다. 동리청년들이 다 모여서 분주소로 내려갔다. 청년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인민의용군을 차출하는 것이다. 분주소원들이 육안으로 신체검사를 한다. 거의 다가 합격이다. 그날이었던가 다음날이었던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결해서 무조건 출발이다. 분주소장 서 씨를 만나서 가기 싫다고 사정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너는 건강하니 가야 된다고 하는 말 뿐이다. 나는 혹시나 빼줄까 하는 바라지는 않았지만 대열 속에 쓸려 따라갔다. 대열은 병영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병영을 지나 장흥 쪽으로 가는 것이다. 장흥은 우리 고장에서 40리 길이다. 오후 늦게 장흥읍에 도착했다. 학교건물에 집결했다. 다른 고장에서 많은 장정들이 와있었고 일부는 인민군식 제식훈련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자마자 부대편성을 했다. 그리고 우리도 제식훈련을 했다. 그날밤은 교실 마룻바닥에 모포 한 매씩 나누어주었다. 두 사람이 한 장 깔고 한 장 덮고 새우잠을 잤다. 식사는 주먹밥에 된장인지 무엇인가를 발라서 준 것 같다. 다음날 일어나서 점호를 하고 세수는 가까이에 있는 하천(탐진강 상류)에 가서 했다. 아침식사 주먹밥을 먹고 제식훈련이 또 시작됐다. 인민군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있었는데 복장은 구구각각이다.


 하얗게 바래진 인민군복을 입은 병사, 미군복을 입고 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낮부터 이상한 소문이 구전되어 들려왔다. 미군이 인천상륙을 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이라 인민군들의 행동거지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바삐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이 수상쩍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달리 행동할 수는 없다. 각기 나름대로 대책을 생각하고 있겠지. 저녁이 되니 식사를 마치고 오락회를 한다고 운동장 한쪽에 소대별로 모이게 했다. 그날이 바로 추석날이다. 소주독(1말들이 술독)을 몇 개 갖다 놓았다. 돼지고기 삶은 것도 많이 갖다 놓았다. 담배도 한 줄(1개 분대)에 한 까치씩 나누어주고 피우라고 했다. 담배하나로 1개분대가 피었으니 각자 한 모금씩 빨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소주잔이 돌고 돼지고기 안주가 나누어지고 해서 소대대항 노래자랑으로 흥이 났다. 그러는 사이 몇 사람은 행동개시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달은 추석달이라 휘황 찬란 구름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 집 떠난 자들에 집생각을 더 나게 했다. 밤이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인민군들이 자리를 떠나고 안보였다. 한 사람 두 사람씩 뒤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뒤로 빠져나갔다. 같은 동리 사람이 있었지만 행동은 같이할 수 없다. 각자 나름대로 눈치껏 빠져나올 수밖에 없다. 학교뒤편이어서인지 담장은 없었고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몇 사람이 나무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막 뛰었다. 주위가 논(畓)이라 논둑길로 앞에 가는 사람의 뒤를 따랐다. 한참 뛰어가다 보니 새막(幕)이 보였다. 안개는 자욱하게 끼었고 이슬이 내려 벼이삭이 축축이 젖어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었었다. 새막에 들어가 우선 몸을 피했다. 한두 사람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 동리 사람은 거의 모였다. 그런데 한 사람 이웃에 사는 "노종용"이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판국에 그를 찾으러 갈 수 없는 것, 우리끼리 행동하기로 했다. 그 친구는 좀 부족한 데가 있었다. 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알 수가 없다. 그 당시엔 시계 차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가정집에도 시계가 거의 없었다. 새벽닭이 울면 새벽이 된 것을 알 정도다. 조금 있으니 새벽닭 우는소리가 먼 데서 들려왔다. 그래서 새벽인 줄 알게 됐고 민가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신작로로 나가자고 했다. 그리고 다 함께 큰길로 나갔다. 조용하다. 차 한 대 다니지 않고 인적도 없다. 고요하기만 했다. 우리는 큰길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우리뿐 아니라 의용군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이젠 살았다. 소식을 듣고 자식 혹은 남편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반대방향에서 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자식 남편들을 찾고 있었다. 더러는 찾아 반가워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나를 찾으러 나가셨단다. 한참있으니 부모님이 나를 찾지 못하고 오셨다. 인민군에 끌려간 지만 알았다고 하셨다. 노종용의 모친이 우리 아들 못 봤느냐고 물었지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고 기다려보라고 했다. 미련한 아들을 탓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 종용이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다. 그날밤 우리는 그 자리를 탈출해 나왔는데 멋모르고 그 자리에 남아있다가 인민군에 잡혀 그들(인민군)과 같이 행동을 했단다. 볏가마니 한 장에 비상식량 약간씩 휴대하고 북으로의 후퇴길에 따라가다가 UN군의 폭격으로 지리멸렬되어 대열을 유지할 수 없어 각자행동하라고 해서 남으로 남으로 해서 며칠 만에 집으로 왔단다. 그때쯤 전황은 어떠했던가. 9월 15일 인천상륙, 9월 19일 한강도하, 9월 22일 서울진입, 9월 26일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9월 28일 수도서울 탈환, 9월 29일 맥아더장군과 이승만과 정부환도. UN군의 주력부대 북진 그리고 남진협공으로 낙오병 소탕작전, 괴뢰낙오병 지리산으로 도망해 들어갔고, 10월 19일 평양입성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북진을 거듭해 압록강까지 진격, 북괴군을 국경 압록강 북으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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