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20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 40명 중 거의가 농촌출신인데 학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사꾼인데 갑자기 공부를 하게 되어 강의가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다. 졸음만 온다. 졸다가 교관으로부터 지휘봉으로 머리통을 맞는 것이 예사다. 무정한 잠은 왜 그렇게도 오는지. 일주일간 배우고 그 요일에 배운 것을 시험 친다. 기준점수 미달자는 수학능력 없는 자로 분류되어 유선교육대로 보내진다. 첫 번째 시험부터 무능자가 있었다. 다 긴장하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래도 졸음이 오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기초적 지식이 없이 공부에 대한 흥미가 상실된 데다 배는 고프고 해서 교육에 대한 열의가 적다. 입대하고서 보충대생활을 제외하고서는 계속 교육만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해도 바뀌고 1952년이 됐다. 날짜는 가지 않고 지루한 교육만 하고 있으니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마저 망각하고 있었다. 그때쯤 휴전회담이 속개되고 있었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후방은 9.28 수복 때 미처 월북,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과 지방 불순분자들이 서남지역(지리산 일대)에 입산 은둔하였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2개 사단(수도사단과 8사단)이 공비토벌작전이 한창일 때였다. 우리는 전황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매일 일과표에 의해 교육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유급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배가 고프니 공부가 되지 않는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일과 개시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밥 얻어먹을 곳을 찾아 헤맨다. 기간병들이 밥을 먹고 수도가에 식기를 씻으러 나온다. 남은 찬밥을 얻어먹고 식기를 씻어준다. 그러한 것이 피교육자들에게는 습관화가 되어버렸다. 매 토요일 주말시험이 끝나면 몇 사람씩 유급되어 나가니 우리 내무반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 실습교육은 별도교실이 있어 그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밤에는 감시병이 지킨다. 밤에 배가 고파 잠 못 이룰 때면 몇몇이 내무반을 빠져나온다. 교실에 가서 어데가야 먹을 것을 구할까 의논한다. 갈 곳이란 취사장밖에 없다. 맨 위쪽에 보병학교 취사장, 다음이 통신학교, 그리고 그다음이 포병학교 취사장이 일렬로 위치하고 있다. 한 번은 포병학교 취사장을 택했다. 세 명이 뒷문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은 망을 보고 두 명은 안으로 들어갔다.
취사병은 쌀가마 위에 이불을 깔고 모포를 덮고 자고 있었다. 가마솥에 씻은 쌀이 들어있다. 빈통이 있어 하나 담고 부식창고에 들어가 멸치봉지와 고추장을 식기에 담아가지고 앞문을 열고 당당하게 나왔다. 취사장 안은 전등불이 켜져 밝았지만 야심해서인지 들키지 않았다. 망보던 한 사람은 취사병이 덮고 자던 이불과 모포를 걷어 내왔지만 모르고 잠에 취해있었다. 이곳에서도 기간사병들이 외출비를 만들기 위해 피교육자 내무반에서 모포 등을 교육 나간 틈을 타고 훔쳐간다. 그리고 우리에게 변상시킨다. 우리 쥐꼬리만 한 봉급에서 변상하고 나면 한 푼도 탈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도 훔쳐다 채웠다. 훔쳐온 쌀은 어떻게 밥을 해 먹냐 하면 먼저 교실로 가져간다. 교실 안에는 대형 스토브 Stove가 있고 방화용수를 담은 드럼 DRUM통이 있다. 양은식기에다 쌀을 담고 방화수를 붓고 해서 스토브 위에다 올려놓고 한참 기다린다. 물이 다 가시면 밥이 된 것으로 알고 꺼내놓는다. 밥은 반숙이라 온전히 될 턱이 없겠지. 그래도 고추장에 멸치를 찍어 반숙밥이 그렇게도 맛이 있다. 배고픈 것이 그렇게도 무섭고 서러운 것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동기간에 맹장염에 걸려 입원한 자가 있었다. 배가 고파 취사장에 가서 잔반통을 뒤져먹다가 불순물이 들어가서 수술받은 자가 있었다. 참 불행한 일이었다. 한 번은 보병학교 취사장에서 누룽지를 한가 마 들고 왔다. 유급되어 30명 정도가 자는 내무반에 가져다 놓았으니 자다가 깨어 그 한가마를 다 먹어치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부터 모두가 설사하느라 고생했다. 음력설날 내가 식사당번이었다. 아침식사를 타러 갔는데 밥이 밤, 곶감, 대추 등을 넣은 찰밥이다. 밥통을 들고 오면서 연신 밥을 입에다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밥을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 담았으니 허벅지가 뜨거워 혼이 났다. 통신학교가 밥은 적었지만 부식은 그런대로 좋은 편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배가 고팠다. 그러한 가운데 겨울은 가고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