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19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가느냐고 했더니 피교육자로 간다는 것이다. 밤늦게 대구역에 도착, 대기해 있는 트럭으로 동촌에 있는 부관학교로 갔다. 학교건물인 것 같았다. 그 당시 군이 주둔하기 위해 징발한 건물은 거의가 학교건물이었다. 휴교령이 내려 휴업상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녁식사를 식당에서 하게 되는데 식당 안에 매점이 있어 매점주인이 민간인인데 우리들한테 고생이 많았다고 하면서 국물을 떠다 주고 먹으란다. 참 고마웠다. 식사가 끝나고 각자 신상명세서를 써내고 우리의 잠 잘 자리가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아 이곳저곳에 분산시켜 자게 했다. 나는 위병소 내무반에서 잘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피교육자로 전입된 것이 아니고 기간병으로 전입했단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후방근무가 된 것이다. 누구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오직 기쁘기만 했다. 지금 같으면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제주도는 인심이 각박하고 인정도 없는 고장이라 내가 4개월가량 머물러 있어 본 실정인데, 대구인심은 판이하게 달랐다. 기간병들과 주민들의 우리를 대하는 것이 좋았다. 물론 제주도에 본래는 그렇지가 않았다고 하는데 군부대가 주둔하고 이북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으니 자연 각박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주변을 살펴봤다. 학교뒤편에 군비행장이 있었다. 밤에도 그러했지만 아침부터 계속 전투기의 이착륙이 끊이지 않는다. 출격을 하는 것인지 훈련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란한 폭음이 가까이에서 멀리 사라졌다가 또 멀리에서 가까이에 학교까지도 시끄러울 정도다. 부관학교는 행정병 양성과 타자병을 교육시키는데 신병교육과 부대근무, 행정병의 보수교육 그리고 부관장교의 양성기관이다. 여군들도 교육을 받고 있었다. 대구는 예부터 사과로 유명한 고장이라 사과나무가 많다. 철이 지나 나뭇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였는데 따내지 않은 사과열매가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있다.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집합하란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위병소 앞에 집합했다. 인원점검이 끝나고 기간사병이 우리 내무반용 천막을 쳐야 하는데 지주목이 없어 산에 가서 베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갈 막사가 없단다. 그래서 우리는 기간사병 인솔하에 산에 지주목을 베러 갔다. 점심때쯤 되어서 지주목 몇 개를 베어와서 천막을 치는데 다른 기간사병이 뛰어와서 작업을 중지하고 개인사물을 지참하고 학교본부 앞에 집합하란다.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무슨 용무인지 모르고 사물을 가지고 학교본부 앞에 집합했다. 특명착오됐다는 것이다. 빨리 식사를 하고 다시 집합하란다. 급히 식당에 가서 식사를 마치고 대기해 있는 트럭에 탔다. 제1보충대로 간다는 것이다. 급히 출발해서 제1보충대로 갔다. 보충대가 시내에 있어 금방 도착했다. 인솔자는 우리를 인계하고 가버렸다. 그곳 보충대 기간병의 지시를 받았다. 2층 내무반으로 올라가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란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곳은 부산동래 제2보충대보다 더 혼잡스러웠다. 완전무장해서 차에 실려 나가는 사람, 또 우리처럼 들어오는 병사들, 끊이지 않고 계속이다. 나가는 사람들은 거의가 동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은 훈련소에서 배출되는 병사 그리고 기술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전후방으로 배출되어 간다. 가끔 전방에서 전투하다가 부상당해 군 병원에 입원 완치되어 다시 전선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할일없이 날짜만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도대체 팔려갈 것인가(배출하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 누가 정보를 전해주는 사람이 없다. 때가 되면 밥 먹고 자고 남은 시간은 내무반에서 잡담이나 하고 소일할 수밖에 없다. 전방으로 가게 되면 동복과 장비가 지급되는데 그렇지도 않으니 더 궁금할 수밖에 없다. 1주일 정도 지났을까. 저녁때쯤 되어서 장교 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전원집합하란다.
50명 전원이 내무반에 집합했다. 중위계급장을 달고 한쪽에는 통신병과 배지를 달았다(나중에 알았음) 육군본부 통신감실에서 왔단다(당시 육군본부는 대구에 있었다) 너희들은 광주에 있는 통신학교로 피교육자가 가는데 무선학과라 그 학과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만 간다는 것이다. 그 학과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은 나오란다. 다섯 사람이 나왔다. 나머지 45명만 명단을 작성하고 내일 출발하니 준비하고 있으란다. 사실 우리 case는 거의가 농촌출신자여서 학벌 수준이 낮았다. 다음날 인솔자가 와서 우리를 인솔해 갔다. 대구역에 나가 상행열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내려 호남선 군용 열차로 오후에 송정리역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실려 상무대로 들어갔다. 상무대는 엄청나게 넓다. 교육총본부와 보병학교, 포병학교, 통신학교, 기갑학교, 육군항공학교 그리고 77 육군병원이 있었다. 우리는 통신학교 무선교육대 무선학과로 됐다. 거기서 또 구두로 지능시험을 치렀다. 또 거기서 5명이 낙방이 되어 대구 1 보충대로 돌아갔다. 우리가 무선통신학과 17기 생이다. 15기까지는 부산에서 창설교육을 이수하고 16기부터 광주로 옮겨왔다. 건물은 교총본부를 제외하고 거의가 미군이 지어준 건물이다. 우리 내무반이 정해져 들어갔다. 우리 내무반 담당선임하사관이 들어왔다. 이중칠(이등중사, 지금의 병장쯤 될 것이다) 우리가 수료할 때까지 지도할 책임자란다. 이북출신인데 우리의 선배다. 인상은 좋았다. 교육기간은 16주간, 학교소개를 해주었고 교육과목은 전기와 무선학리, 통신법규 그리고 통신기기에 대한 개념과 조작운용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된단다. 그리고 우리 자치적으로 내무반장, 서무계, 공급계를 선출하라고 했다. 개인장비와 보급품이 지급되었다. 각자위치가 정해지고 내무반장과 서무계, 공급계의 선출이 끝나고 관물정돈도 끝냈다. 식사는 밥을 타다가 내무반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있다. 시설이 부족해서 식당이 없단다. 우리 인원이 적기 때문에 건물의 반을 칸막이하고 사용했다. 겨울절이라 기름난로가 설치되 있는데 하루정량이 5G/日의 양이라 큰 부족이다. 최하의 온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도 계급장을 달고 처음으로 군인다운 생활이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피교육자, 저녁식사도 마치고 학습교육에 들어가기 위해 필기구가 지급되고 교재도 지급받았다. 일석점호가 끝나고 취침에 들어갔다. 종일 바쁜 시간을 보냈기에 피곤해 금방 잠이 들었다. 다음날 기상, 점호, 세수, 청소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일과 시 전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상무대는 벌판에 위치해 바람이 세고 춥다. 이곳 또한 밥의 분량이 적다. 한참 먹을 나이라 먹고나도 금방 배가 고프다. 지급되는 정량이면 부족하지 않을 텐데 하루정량이 쌀 720g이다. 충분할 텐데도 위에서 떼어먹고 기간병은 정량이상으로 가져가니 자연 우리 비교육자들만 양이 적을 수밖에 없다. 비단 통신학교뿐만 아니라 훈련소, 보충대(제주도 3 보충대를 제외하고) 다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군대는 어데 가서 호소할 곳도 없다. 첫 시간은 무선교육대에서 입교식을 가졌다. 교육대장 김대제 대위의 훈시로 입교식을 마쳤다. 교육은 내무반에서 마룻바닥에 앉아 책상을 놓고 했다. 첫날부터 딱딱한 전기원리와 통신원리를 배우는데 곤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