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21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간 전기학과, 무선학과, 그리고 통신법규를 배우고 전건(Key) 조작(국영문)을 배웠다. 모르스 MORSE부호를 배우는데 어려워서 힘들었다. 지금까지도 대강은 외운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교총본부식당 앞으로 지나치는데 준위 한 사람이 나를 보고 아는척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통신학교로 오기 위해 열차를 타고 오는데 그 열차 안에서 만난 장교였다. 우리가 통신학교로 간다고 했더니 학교에 관한 것을 알려주었고, 교총본부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아침식사 때라 식사하러 온 것이다, 식당으로 들어오란다. 염치 체면 따위는 없다. 돌아보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배식당번에게 밥과 국을 담아서 주란다. 밥과 국을 담아 내 앞에 가져다주었다. 장교식당인데도 별 부식은 없고 무, 소금국이다. 장교들은 몇 숟갈 떠먹다가 나가버린다. 나는 아침식사를 했지만 그 당마다 준 밥과 국을 다 먹어치웠다. 배가 너무 부르다. 잘 먹었다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다. 나와서 보니 사방이 조용하다. 그때는 시계도 없었으니 몇 시가 됐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일과는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큰일 났구나 싶었다. 군대는 당시 일과개시는 8시다. 교실 앞에 서니 가슴이 떨린다. 슬며시 문을 열었다. 이미 교육은 시작되고 있었다. 조교가 교육대 내에서 가장 무서운 조교 우중칠(이등중사)이 눈을 부릅뜨고 들어서는 나를 노려보는데 겁이 더럭 났다. 고양이 앞에 쥐가 된 것이다. 강의하다 말고 단에서 내려와 앞으로 오란다. 조교 앞에 가까이 갔다. 이 새끼 하면서 나를 두 손으로 앞가슴을 밀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마룻바닥에 나뒹굴었다. 피복이 지급된 것이 동정복과 방한복 그리고 동내의가 있었는데 누가 훔쳐갈까 봐 항상 입고 다녔다. 동정복 위에다 방한복을 입었으니 꼭 맹꽁이와 같다. 몸동작이 둔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밥을 잔뜩 먹어놨으니 일어나지도 못하고 천정만 쳐다보고 허우적거리니 가관이었을 것이다. 겨우 일어나 조교 앞에 섰다. 교봉으로 손바닥을 때리는데 배는 부르고 숨은 가쁘고 손바닥은 아프고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무선교육대에서는 엎드려뻗쳐 기합은 없다. 전건(Key)을 치기 때문에 오른손을 아주 아낀다. 그래서 기합도 가려서 준다. 가급적이면 삽질도 못하게 한다. 며칠 동안은 배고픔도 잊었었다.
일요일은 외출을 한다. 통신학교에서 집에까지는 약 200리(83km)인데 위수지역을 이탈할 수 없어 통신학교가 있는 광주에서 놀다가 귀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외출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간에 집에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겠지만. 또 집에 간다고 해도 돈 한 푼 얻어올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다. 집에서 면회 와서 돈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일요일마다 외출을 한다. 일요일은 세탁하는 날이다. 그리고 이 잡는 날이다. 난로 앞에 앉아서 내의를 벗고 러닝셔츠를 벗어 우선 난로 위에 턴다. 이가 떨어져 콩 볶듯이 툭툭 소리 난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은 이를 잡는다. 보통 러닝셔츠 하나에서 2,3백 마리의 이를 잡는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말한다. 더군다나 못 먹는 터에 이에 시달리니 쇠약할 수밖에.
이제 통신학교에서의 마지막 일요일도 다 가고 외출자도 돌아왔다. 내일부터 한 주일간은 야외실습훈련이다. 일석점호가 끝나고 취침시간이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 기상, 출동준비에 분주하다. 인원이 적어 연대편대로 구성편성됐다. 연대본부조와 3개 대대조로 구분편성되었는데 나는 대대편성조로 됐다. 연대는 SCR-193 무전기(AM)와 SCR-609FM무전기, 대대는 SCR-694(AM)와 FM SCR-609로 장비됐다. 일주일분 주부식을 수령하는데 쌀은 4홉씩밖에 주지 않는다. 그것마저 2홉씩 떼어먹는다.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못한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피교육자인가 보다. 실습장은 장성 “비아”다. 그곳은 보병, 포병, 기갑, 통신학교의 야외훈련장이 있는 곳이다. 우리 조는 6명과 조교 1명, 숙소는 민가에 방하나 빌렸다. 훈련은 하루 몇 차례 AM과 FM의 교신만 하고 하루종일 산등선에서 보내고 지루하다. 오후 일과가 끝나면 장비를 거두어 민가숙소로 돌아온다. 그리고서는 다음날 아침까지는 자유다. 배가 고프니 밤이면 촌락에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다. 감시병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 큰집을 찾아간다.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매일밤 얻으려 오니 귀찮을 것이다. 대부분 외면해 버린다. 운이 좋으면 쌀을 조금 얻을 수가 있다. 어떤 때에는 김치와 된장 고추장을 퍼오기도 한다. 지금 같으면 진정서라도 냈을 테지만 그때는 그러하지는 않았다. 한 주일도 금방 지나갔다. 내일은 졸업식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이젠 전방전선으로 가야 하겠지.
그날밤 각자에게서 돈을 거두어 술을 사고 안주는 취사장에서 얻어와서 구대장과 조교들을 초청해서 조촐하게 회식을 했다. 감개가 무량하다. 다음날 아침 장비는 전날 반납했고, 개인장비와 동정복을 반납, 방한복장뿐이다. 졸업사진은 실습 나가기 전에 찍었다. 교육대장 임석으로 이루어졌다. 사진을 나누어가지고 조교들과 악수를 나누고 석별의 정을 나누고 떠났다. 언제나 또 이 학교를 다시 볼까 하고서(그 후론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지금은 대전으로 옮겨졌다).. 우리기가 17기인데 17개 기 중에서 가장 작은 27명이 수료했다(지금도 그 사진은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