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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Feb 13. 2024

제주도 수용대를 벗어나 육지로

할아버지 회고록 18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제주도 수용대를 벗어나 육지로




그 당시 우리에게 들리는 소문은 전방에 가면 죽는다라고 들었다. 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시작했지만 UN군의 전선정리를 위한 제한공격이 시작됐고 그 유명한 피의 능선 전투, 그리고 단장의 능선 전투의 격전 때였지만 전선에 가서 싸울지라도 제주도에는 남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잠시 피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변소에 가 숨었다. 그때 우리는 제주도를 일컬어 3 불순이라 불렀다. 일기와 질병(이질) 그리고 식수의 3불을 말했다. 본래 제주도 탐라, 일정 때는 전라남도에 속한 군이었다. 일본과의 밀왕래가 많았다. 그래서 육지사람과의 언어소통이 잘되지 않았어도 일본어로는 소통이 잘되었었다. 1.4 후퇴 때 흥남에서 수송선에 실려온 피난민을 이곳 제주에 퍼 내렸기에 이북 피난민들이 집결해 살았던 것이 특징이었다. 변소에서 한참있다가 나와서 보니 조용했다. 분류가 끝났는가 싶었다.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소졸 이하는 육지로 보내고 중졸 이상은 일부는 기간요원 그리고 남은 병력은 하사관학교로 배출된다는 것이다. 나도 영락없이 하사관학교로 가겠구나 싶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 육지 같으면 도망이라도 갈 수 있다고 하겠지마는 이곳은 섬이다. 훈련기간이 4주간이라 훈련 마치면 육지로 가겠지 하고 마음을 달래고 자신을 위로했다. 저녁 해 질 무렵 차가 왔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사관학교로 갔다. 건물이란 없고 벌판에 천막만 쳐 있는 곳이 하사관학교란다. 소대가 편성되고 천막내무반이 정해졌다.


신병훈련소보다 대우가 월등히 나은 것 같았다. 개인피복과 장비 그리고 식사도 좋았다. 그 당시 계급은 미국식을 본따라 일병 상병 하사 이중 일중 이상 일상 특무상사, 하사부터 하사관 대우를 받았다. 신병훈련보다 수월했다. 우리가 20기 A반, 인원은 100명, 우리가 입교 다음날 100명이 또 입교했다, 20기 B반. 어느덧 4주간의 훈련도 끝나고 수료하는 날이 왔다. 11월 초 한라산 봉우리에는 하얗게 눈이 덮여있었다. 4주를 마치고 그다음 날 제3보충대대로 가게 됐다. 수료식을 해야 하는데 계급장이 없다. 무조건 만들어 달고 오란다. 모자와 가슴에 색깔은 노랑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탄약고에 가서 수류탄통에 감긴 노랑 TAPE를 얻어와서 종이딱지에 오려서 만들어 달고 왔다. 우리도 얻어다 만들어 달고 왔다. 지금 사람은 곧이듣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대가 그랬다는데 이유 없이 무조건이다. 수료식을 마치고 3 보충대로 갔다. 위치가 화순 해수욕장 부근이 아니었나 싶다(지금은 그 부대가 춘천에 이동 주둔하고 있다) 그곳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지상천국이다. 점호도 없이 밥은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추워서 바닷가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물이 흐르는 경치 좋은 골짜기에 내려가 빨래도 하고 낮잠도 자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그곳이 관광지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관광명소로) 3 보충대대에서 2주일 정도 있었다. 자유스러웠던 날도 지나고 11월 말경이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가 바랐던 육지로 가는 날이 왔다. 각개인에게 동기피복인 방한복이 지급되었다. 동내의, 방한화, 방한모, 장갑 등 그리고 총을 제외한 개인장비도 지급되었다. 이제 육지로 가면 곧바로 전지로 가는구나 싶었다. 막상 전선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살아서 집에 갈 수 있는가 아니면 죽어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에 잠기니 고향집 생각이 난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잠깐이나마 정들었던 막사가 뒤돌아봐진다. 그곳 기간사병들은 부산 제2보충대대로 가면 이곳보다 나을 것이라고 해서 우선은 안심이 되었다(위안이 됐다) 우리는 3 보충대를 뒤로하고 부두로 나갔다. L.S.T가 정박해 있어 차에서 내려 승선했다. 여수에서 올 때와 같은 배였는데 선실 밑창에는 병들이 자리했고 우리는 하사관이라 해서 침대칸에서 잘 수 있도록 배정해 주었다. 군대는 계급인가 보다. 선실 가운데는 통로가 있고 양편에 침대가 3층으로 되어있었다. 옷을 벗고 러닝과 팬티 바람으로 편히 누워서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부산에 도착했다. 미군트럭에 실려 동래에 있는 제2보충대대에 들어갔다. 학교건물인데 군에서 징발한 건물인 것이다. 그곳은 제주도 3 보충대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보였다. 계속 병력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고 있었다. 총을 제외하고 완전장비를 갖추고 전방으로 배출하는 장병들을 보니 우리도 곧 전방으로 배출되겠지, 어느 전선으로 배치될까, 전황은 어떠한가, 궁금함과 공포감마저 들었다. 모두가 운명이겠지 하고 그 운명은 하늘에 맡겼다. 식사와 잠자리가 3 보충대에 비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밥도 적어 배가 고팠다. 약 1주일 정도 대기했는데 집합하란다. Case가 200명(하사관학교 20기 A, B반)인데 호명하는 사람은 50명을 별도로 집합시켰다. 그중에 나도 들어있었다. 2층에 올라가란다. 2층에 올라가니 미제정복이 마룻바닥에 쌓여있는데 사지잔반, 모피 y샤쓰와 정복하의가 쌓여있었다. 각자 맞는 것으로 갈아입으란다. 다 자기 몸에 맞는 것을 고르느라 한참 법석을 떨었다. 어차피 새것도 아닌 중고품이라 그것이 그것이다. 동복과 개인장비는 그 자리에서 반납하고 막사 앞에 집합했다. 호명을 다시 하고 출발대기를 시켰다. 조금 있으니 이등중사 한 사람이 와서 우리를 인솔했다. 건빵상자 몇 개를 우리에게 들게 하고 차에 승차시켰다. 우리는 부산역에 도착했다. 곧 군용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승차하란다. 인원을 다시 점검하고 건빵을 한 봉지씩 나누어 주었다. 열차에서 식사를 할 수 없으니 대용식사란다. 처음 먹어보는 건빵이라 맛이 좋았다. 인솔자가 육군본부에서 나왔다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대구에 있는 고급부 관학 교로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복으로 갈아입을 때 전방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후방 어데인지는 알지 못했었다. 이제는 확실히 후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이젠 우리는 살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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