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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Feb 07. 2024

제주도 수용대

할아버지 회고록 16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제주도 수용대



 하루는 기간병이 와서 열쇠로 문을 열고 나오란다. 우리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부관이 이번에 병력차출이 있으니 가란다. 좋은 곳이란다. 몸은 회복되지 못했지만 빨리 고통스러운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창고에 가서 사복을 갈아입고 오란다. 그래서 영창 안에 붙어있는 창고에 들어가서 내가 집에서 입고 온 옷(방위군복)을 겨우 찾아 입고 연병장에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와 같이 갈 사람들이다. 조금 있으니 민간 화물트럭이 왔다. 불편한 몸이지만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인원점검이 끝나고 차가 출발했다. 행선지는 어데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편했다. 어두워서 닿은 곳이 여수의 부두였다. 큰 배가 정박하고 있었다. 인원파악도 하지 않고 무조건 승선시켰다. 미군 수송선(L.S.T)이다. 승선은 했지만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칠흑과 같은 밤이다. 군사비밀이라 밤에 출항하는 모양이다. 밤늦게 출항을 했는데 태풍으로 인해 먼바다로 나갔다가 회항해 다시 본디 있던 부두로 정박했다. 밤이 깊었다. 태풍이 가고 인원을 더 태우고 출항했다. 제일 밑창에 장정을 몰아넣는데 숨이 막힐 지경이다. 칠월이라 계절적으로 더위가 한창인 여름이고 배밑창 통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엔진소리와 내뿜는 열기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갑판 위에 올라와서 있었다. 뿌옇게 날이 새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라 수평선에 점하나 없어 어느 해상인지 알 수가 없다. 날이 완전히 새고 해가 오르기 시작했다. 목이 마르다. 어제 종일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선 물로 갈증을 면해야 했다. 급수시설이 없다. 갑판 배의 뒤쪽으로 가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도 그곳으로 끼어들었다. 물을 겨우 마시고 있는데 주번완장을 어깨에 두른 장병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가라고 쫓는다. 그 등살에 나도 밀려 나왔다.


 한참 나오는데 누군가가 「오이 오이」하는데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데 흰색 선원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부르느냐고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갔다. 일본인이다. 대뜸 하는 말이 「오래오 와가라나이가」 그 당시 나는 우리말보다 일본어가 더 유창했다. 서로가 일본말로 소통을 했다. 일본에서 「살지 않았느냐」 “그렇다” 「세토에서 살지 않았느냐」 “그렇다” 「도원학교에 다니지 않았느냐」 “그렇다” 「보구오 와가라 나이가」 나를 모르겠느냐고 물었다. 모르겠다고 했더니 원산을 아느냐고 물었다. 안다고 했더니 그의 형이란다. 원산은 나의 친구 학교동창이다.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그의 형이 상선학교를 나오고 전쟁 때 수송선을 탄다는 이야기는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와 헤어진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동생은 잘 있느냐고 물었더니 죽었단다.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산사태로 죽었단다. 그의 집이 산밑에 있었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자기를 따라오란다. 선원식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주방근무자에게 밥을 가져오게 했다. 밥과 반찬을 식탁 위에 차려놓고 먹으란다. 다른 선원들과 여자들이 다가와 어떻게 아는 사이냐 일본 어데서 살았었느냐 등 묻고 많이 먹으라고 더 가져다주곤 했다. 일본은 비록 패망은 했지만 그들의 기술을 인정하고 미군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일본인을 채용했다. 선상생활에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부인인지 애인인지 모르지만 여자를 태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식사한 것 같다. 담배도 피우라고 갑으로 내주기도 했다. 밖에 나와서 내가 물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느냐 했더니 제주도에 가서 장정들을 내려주고 일본에 가서 보급을 받고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나를 일본에 데려다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저들 목이 달아난단다. 안된다는 것이다. 버티어 볼까 했지만 한번 혼이 났기 때문에 포기하고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배밑창은 더워서 잘 수없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다.


 선실이 비어있어 들어가 침대에 누워보았다. 밀폐된 곳이라 더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나와버렸다. 그리고 선실밖에서 아무 데서나 뒹굴다가 날이 샜다. 그리고 배가 제주도에 닿았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대기시켜 있던 미군트럭을 타고 수용대로 들어갔다. 수용대 위치는 산방산이 가까이 바라보이는 곳이라 남제주의 화순부근인 것 같다. 24인용 천막이 줄지어 쳐있는데 잠정소대로 편성, 천막이 할당되었는데 천막 안에 들어가 봤더니 맨바닥이다. 기간병이 와서 맨바닥이라 잘 수없으니 침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침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와야 한다고 해서 기간병의 인솔로 산에 가서 팔뚝만 한 소나무를 베어왔다. 가운데 통로를 남겨놓고 양쪽에 깔고 해서 그 위에 마포포대를 뜯어 매트리스를 만들어 깔고 그 위에 모포를 깔았다. 훌륭한 침대가 되었다. 이웃천막에 가봤더니 먼저 와있던 고향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이미 훈련소에 신병입대한 친구들도 있단다. 다음날부터 할 일은 별로 없다. 미화작업이나 하고 소일했다. 차츰 나의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누우면 등과 허리가 아팠다.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가도 입소차례가 오지 않는다. 매일 신병입소하는데 육지에서는 매일 장정들이 이 수용소에 들어오고 있었다. 답답하니 빨리 입소하고 싶었다. 물이 귀하니 식수도 귀했다. 내가 제주도에 건너오기를 7월 초순에 왔다. 매일 호명해서 차출해 가는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지루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7월 26일 드디어 호명이 되어 입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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