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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Jan 27. 2024

탈영시도

할아버지 회고록 14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탈영시도



그날밤에 둘이서 붙어자는데 상배가 귓속말로 내일 행군 시 목적지에 가서 도망하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타이르고 만류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간청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거절을 했지만 그의 설득에 나 자신도 모르게 내 결심이 무너지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해버렸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점호를 마치고 행군준비에 들어갔다. 우리의 준비물로써는 세면도구 수건 하나와 편지 쓰기 위해 가져온 필기도구와 그리고 배고플 때 먹으라고 집에서 싸준 미숫가루봉지 등 다시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하고서 연병장에 집합했다. 소대별 개인별 거리를 유지하고 출발했다. 대대라고는 하지만 실재로는 중대병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상배와 나는 앞뒤로 해서 행군을 했다.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무엇인가에 쫓기는 기분이다. 행군하면서 주변의 사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어떻게 이탈할까 하는 마음뿐이다. 점심때쯤 되어서 목적지인 장터에 도착했다. 시골 5일장 장터라 장날이 아닌 날은 한가하다. 그날은 장날이 아닌대도 분주했다. 우리 부대 전원이 장터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있어 주막이나 밥집에 식사를 시켰고 또 민가에까지 식사를 시켰기에 분주할 수밖에. 대대장이 특별배려해 준 것이다. 우리는 대여섯 명이 술집 방에 함께 들어가 한상에 앉았다. 흰쌀밥에 반찬은 몇 가지 안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성찬이다. 마당에 집총을 해놓고 맛있게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마루에 나와 태연하게 앉아 담배 한 대 물고 잠시 앉아있었다. 태연한 채 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그리고 용기를 냈다. 그리고 서로 눈짓으로 신호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총은 그대로 두고 나섰다. 골목으로 해서 큰길로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저쪽 골목길에서 기간병 둘이 나오고 있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경례를 부쳤다. 어데 가느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무엇 사러 간다고 얼버무렸다. 빨리 갔다 오라고 하면서 지나갔다. 휴- 한숨을 쉬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로 들어갔다. 「전시에는 현지이탈자는 즉결처분을 한다」고 들었지만 즉결처분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안다 해도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작정 부대에서 멀리 이탈만 하고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는 일념뿐이었다. 생소한 곳이라 지리도 모르고 방향도 알 수 없다. 무작정 걷기만 했다. 한참 가다가 보니 바다가 보였다. 지금 지도를 펴놓고 생각해 보면 순천 별량이나 벌교 앞바다쯤 되지 않을까 싶다. 썰물이 되어 갯벌이고 저만치 건너편 멀리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 기차만 타면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로에 섰다. 갯벌을 건너가자니 가운데쯤 깊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고 해변을 돌아서 가자니 멀고 또 기간병에게 들킬지도 모르고, 한참 생각 끝에 갯벌을 건너가기로 했다. 하의와 신을 벗고 갯벌로 들어갔다. 석양이 질 무렵이라 차가웠지만 참고 건너기 시작했다. 점점 깊어지는데 걱정이 됐다. 그렇다고 돌이킬 수도 없고 막막했다. 그러나 일단 결행한 것 끝까지 가보자 하고서 전진했다. 다행히 팬티가 젖을 정도까지는 깊지 않았다. 겨우 건너가서 발을 씻고 옷을 입고 저만치 기차역이 있는 곳으로 재촉해서 갔다. 시골 간이역이라 사람도 몇 되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태연하게 역 개찰구로 통하지 않고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누구 한 사람 말하는 사람 없었다. 한참 기다리니 열차가 왔다. 어디로 가는 열차인지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어디든지 떠나기만 하면 된다. 열차에 올라탔다. 한참 가다 보니 보성역에 닿았다. 보성은 많이 듣던 고장이고 장흥과 접경이라 여기서 내리면 되겠다 싶어 내렸다. 그리고 겁 없이 출구로 차표도 없이 나갔다. 역무원이 군복 입은 우리에게 묻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막 출구를 지나는데 사복 한 사람이 우리를 붙들었다.


 신분증을 보잔다. 외출 나왔는데 증명서는 가지지 않고 나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조사할 것이 있다고 우리를 역전파출소로 데려갔다. 아차! 우리가 실수했구나 싶었지만 때는 늦은 것이다. 보성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고 또 군인이라면 그러한 복장으로 다닐 수 없고 경찰이 수상히 여긴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우리가 민간복으로 갈아입거나 우회했거나 했어야 하는 것인데. 2층 수사실로 끌려갔다. 안에는 책상이 하나 있고 의자가 몇 개 있었다. 취조관인 듯싶은 사람이 들어왔다. 공손하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 벽에 굵은 참나무몽둥이가 세워져 있었는데 한문으로 정신봉이라 쓰여 있었다. 그것이 사람을 때리는 몽둥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소속부대와 인적사항을 물었다. 그래서 아는 대로 대답했다. 증명도 없이 어떻게 외출을 했느냐, 구두승인을 받고 나왔다.라고 했지만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단 부대이탈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을 터이니 가지고 있던 총을 자기들에게 달란다. 우리가 행군 중 부대이탈했음은 솔직히 말했었다. 그래서 총을 요구한 것이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총을 그대로 두고 몸만 나왔다고 말했지만 곧이듣지 않고 다그치다 안되니 엎드리게 하고 정신봉으로 치는데 까무러칠 뻔했다. 처음 그러한 몽둥이로 맞아본 것이다. 몇 대를 얻어맞으니 아프기도 하고 겁도 났지만 사실 그대로 그 외의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취조관도 그 이상 추궁해 보았자 소득이 없음을 알고 본서로 넘길 터이니 기다리란다. 한참있으니 내려오란다. 궁둥을 얻어맞았으니 걸음걸이가 어려웠다. 그 당시에는 겁만 먹고 더 이상 맞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수갑을 채우고 차에 태웠다. 경찰서에 이송되는 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군대 간다고 가족들 집을 떠나왔는데 동네사람들의 송별을 받고 떠났는데 도망자로 낙인이 찍혔으니 어찌하리. 보성경찰서에 도착했다. 조사를 받고 수갑을 풀고 유치장에 들어갔다. 먼저 들어와 있는 사람이 두 사람인가 있었다. 한 사람은 사상범이고 또 한 사람은 무슨 죄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좁은 유치장안엔 마룻바닥이고 한쪽 구석에 용변을 보는 곳인데 뚜껑이 덮여있었다. 벽면 높은데 조그마한 철창문이 있었고 출입문은 두껍게 된 판자로 되어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감시와 식사를 넣어주는 곳이다. 선임자는 통로 쪽에 자리하고 늦게 들어온 자는 변소 가까운 곳에 앉으란다. 그 안에서는 선임자가 절대적이다. 나이도 소용없다. 우리는 유치장 규칙을 몰라 가운데에 앉았더니 저쪽으로 가란다. 겁에 질려 구석 변소 있는 쪽으로 가서 앉았다. 무슨 죄로 잡혀왔느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사실대로 말했더니 내일이면 나가겠구먼 하는데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점심을 잘 먹었지만 저녁 늦게까지 굶었으니 배는 쪼록쪼록 하는데 몽둥이로 맞은 곳이 아팠고 저지른 일에 후회스럽기도 하고 상배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나 자신 미련했음을 탓하기도 해보기도 했고 다. 소용없는 생각이었지만 왜 내가 그때 세게 반대하지 못했던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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