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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Jan 21. 2024

1.4 후퇴 후 군입대

할아버지 회고록 13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공기가 게양되는 파출소



 1.4후퇴로 타도 제2국민병에 소집, 장흥까지 갔다가 전황이 승전으로 다시 귀향했다. 그리고 우리 면에 방위군 구대(중대)가 편성되어 편입되었다. 구대장에 방위군 중위가 왔다. 기초훈련으로 제식훈련을 가르치는데 복장이 제각각이다. 그 당시에는 농촌사람들은 무명옷(한복) 차림이 거의였다. 신도 대부분이 검정고무신이고 이러한 사람들을 훈련을 시키니 가관이다. 총은 구대장이 휴대한 칼빈소총 한 자루뿐이다. 그래서 구대장이 각자 목총을 만들어 오란다. 며칠 후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만들어 가지고 오기 시작했다. 목총은 가졌지만 복장이 바지저고리라 볼품이 안 좋다. 그래서 구대장이 제안을 했다. 우리도 군복 같은 제복을 해 입고 총도 몇 자루 사잔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돈을 만들기 위해서 유치면에 가잔다. 그곳에 가서 돈 될만한 물건을 가져오자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 설명인즉 유치는 공비토벌작전으로 민가를 불 찔러 버렸단다. 그곳은 깊은 산중이다. 농민은 피난 갔고 집은 불탔으니 사람도 없단다.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 가져와서 팔아 돈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다음날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옴천면을 지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길이 험해 정오쯤에 유치에 도착했다. 첩첩산중 드문드문 있어 보인 민가는 불타 내려앉아 까맣게 형체만 남아있었다. 그런 곳에 무엇 돈 될만한 물건이 있을까 싶었다. 구대장이 불탄 민가 주변을 뒤져보란다. 곡식과 엽연초를 찾으란다. 산중이라 벼농사는 많지 않고 주로 콩 등 잡곡과 엽연초 등이 경작되는 곳이다. 삼삼오오 흩어져서 민가 주변을 뒤졌다. 발로 밟아보고 쿵쿵 속이 빈 소리가 나는 곳을 파 보았다. 항아리가 묻혀있어 그 안에는 곡식이 감추어져 있었다. 어떤 곳은 목관을 묻어 놓았는데 관뚜껑을 열어보니 엽연초가 가득히 들어있었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노획물이다. 각자 집에서 싸가지고 간 점심밥을 작업하는 틈새에 먹기도 했다. 그런대로 많은 것을 얻었다. 피난 간 주민들에게는 미안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미안한 생각은 없었고 다만 많은 것만 탐욕했다. 해가 짧을 때라 서둘러 철수했다. 본부인 작천초등학교에 도착했다. 각자 가지고 온 물건을 내놓고 보니 상당한 양이다. 우선 학교창고에 보관했다. 그 당시 학교가 휴교령이 내려져 휴학 중이라 우리가 이용할 수 있었다. 다음날 그것을 팔아 시골에서 짠 무명베(목면포)를 사다가 국방색으로 염색해서 군복을 만들게 했다. 마침 대원중에 양복점을 하는 사람이 있어 훈련소집을 면제해 주기로 하고 만들게 했다. 각자 사이즈를 쟀다. 한 달쯤 걸려서 군복 그리고 모자까지 완성되었다. 검은색 운동화도 구입해서 신으니 군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칼빈소총도 몇 정 구입했다. 어디에서 구입했는지는 모르지만 노획물을 암시장하는 곳이 있었던 것 같다.


 군에 편성된 정규방위군 편대(대대)의 초대(소대)가 우리 면에 와서 시범훈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보급행정이 뒤따랐기 때문에 정규군인과 똑같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소총(M-1) 군복 등으로 우리는 잠정편성된 것이라 보급행정이 뒤따르지 못했다. 우리는 매일 모여서 형식적인 훈련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한참 농촌에는 농사일에 바쁜 시기에 51년 6월 초 돌연 방위군 해산령이 내렸다. 우리는 잠정적인 집단체라 무슨 형식이나 절차도 필요 없이 해산했다. 다음날부터 농사에 종사했다. 그런데 6월 24일로 기억된다. 지서에서 청년들 지명소집했다. 현역군으로 가기 위해 모인 것이다. 육안검사로 판정, 현장에서 징집영장을 직접 발부했다. 대부분이 합격되어 영장이 집행됐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날 출발한다는 것이다. 다음날 6월 25일 6.25 발발 1주년이 되는 날 부모님, 누님 그리고 동생들을 이별하고 출발했다. 면 지서에 모여 군에 집결, 화물트럭에 실려 순천으로 갔다. 여기에서 누님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목포에 살던 누님부부가 생활터전을 잡기 위해 조치원으로 옮겨 살다가 사변을 만난 것이다. 자형은 병으로 죽고 누님 혼자 장사를 치르고(화장해서 유골은 가까운 절에 납골) 혼자서 피난길에 올랐다. 때가 1.4 후퇴 때라 추운 겨울에 산으로 산으로 내려오다가 굶고 추위를 견디며 노숙을 하면서 늦은 봄에 집에 당도했다. 탈진상태가 되어 기진맥진되어 있었다. 지금 같으면 당장 병원에 갔을 텐데 물론 가난도 했지만 병원도 없었다. 사약으로 치료하겠지 하는 무지로 쇠약해진 누님을 보고 떠나려 하니 마음 아팠다. 그렇다고 내가 집에 있다고 별 뾰족한 수도 없었지만 그것이 누님과 나와는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이 된 것이다.


 우리가 집결한 곳이 순천 모 여자고등학교였다. 각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그곳이 예비군(현역훈련소로 가기 전 대기시켜 놓는 임시수용소의 역할) 사단본부라 기억된다. 그곳에서 분산 수용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떨어진 제지공장으로 갔다. 들가운데 있는 공장인데 전시라 징발된 건물이다. 허름한 공장건물인데 이미 대대가 편성되어 많은 장정들이 수용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현역대위가 있었고 중대장은 방위군 중위로 이미 해산됐는데도 방위군 장교계급장을 달고 지휘하고 있었다. 부관이라고 있었는데 그도 역시 방위군 장교 소위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사병들(기간병)이 몇 명 있었다. 우리의 내부반은 건물 2층으로 정해졌고 소대편성이 되었다. 우리 고향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내동에 사는 박상배라는 친구와 같이 있게 되었다. 그래도 고향친구가 한 사람 같이 있게 된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낡은 국산군복과 운동화가 지급되었다. 그리고 모자와 수통도 국산이 지급되었다. 다음날부터 훈련이 시작됐다. 무장은 소총이 지급되었는데 구구각각이다. M1, 칼빈, 중공제 장총(두 가지가 있는데 창검이 달린 짧은 총과 달리지 않은 긴총), 그리고 일제 38식 99식 등이고 모자란 것은 죽창으로 대용품 했다. 종일 제식훈련만 받는다. 며칠 후 사격훈련도 했다. 식사 때는 영제 프라이팬 식기로 밥을 타다가 내무반에서 먹었다. 나는 도대체 이 부대가 설치된 목적이 무엇이며 임무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 후에 알았지만, 그곳에서 약 2주일가량 훈련을 받은 것 같다. 대대장이 전원을 집합시켜 놓고 훈시를 하는데 내일은 부대행군을 한다고 했다. 목적지는 대대장의 고향의 장터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거리는 약 10km 정도 된다는 것 같다. 오랜만에 영외로 나가는 것이라 마치 초등학생들 소풍 가는 전날과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이 들떴다고나 할까 기다려졌다. 친구 상배와 나는 낮에 훈련받을 때나 식사할 때나 잠잘 때도 항상 같이 붙어 다녔고 심지어 변소까지도 같이 다닐 정도였다. 집 떠나 멀리 이곳에서 고향친구란 단둘뿐이었기에 서로가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밤에 둘이서 붙어자는데 상배가 귓속말로 내일 행군 시 목적지에 가서 도망하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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