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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24. 2023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공기가 게양되는 파출소

할아버지 회고록 12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공기가 게양되는 파출소



 그 승리의 기쁨도 잠시뿐 중공군의 개입으로 UN군의 철수, 비극의 일사후퇴를 겪게 되었다. 51년 1월 3일 남진, 의정부를 침입했다. 다급한 이승만정부는 1월 4일 임시정부를 부산으로 옮겼다. 일반시민도 거의 전부가 남으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그때쯤 나는(우리는) 어떻게 지냈는가. 인천상륙으로 허리가 잘린 북괴군은 지리멸렬 북으로 후퇴하고 남쪽에 있던 괴뢰군은 UN군에 의해 소탕되었고 일부는 지리산으로 일부는 지방의 심산에 들어가 밤에는 하산, 부락에 침입, 식량을 약탈해 갔고 또 지방 빨갱이들과 연락, 양민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오히려 6.25 때보다 더 많은 양민이 희생되었고 피해를 당했다. 우리 집은 외딴 산밑집이라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아는 사람들도 가끔 찾아온다. 무턱대고 방으로 들어온다. 우리 집이 가난한 줄을 알면서도 밥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거역할 수 없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에 우리가 굶더라도 해주었다. 가끔 부락청년들이 한두 사람 붙들려가곤 했다. 돌아온 사람도 있었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실종된 것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밤에 청년들 모이란다. 당시 인민치안대는 도망가고 아직 경찰이 들어오기 전이라 치안과 행정이 부재하였을 때다. 안 모일 수 없다. 동네로 내려갔더니 무조건 면 소재지로 가잔다. Leader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저 가는 데로 따랐다. 누군가가 지서, 학교,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란다. 군중이 그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그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겁결에 도로가 배수로에 뛰어내려 숨어버렸다. 조금 있으니 면사무소가 불이 났다. 그리고 학교도. 지서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길로 도랑으로 해서 집으로 도망해 왔다. 지금까지도 거기에 내가 갔었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날일을 자수하기 위해 성전경찰지서에 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때는 모이라고 전달이 오면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 불응하면 적색분자(부역자)로 취급당한다. 부락단위로 어린아이들만 남겨두고 성전경찰지서로 향했다. 샛길로 가지 않고 큰길을 택해 갔다. 평리 앞을 지나 장터 사거리로 해서 우회해서 갔다. 가는 도중 샛길로(산길)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넘어오고 있었다. 늦게 나와 우리와 합류하기 위해 샛길로 오는가 보다 하고 바라보면서 가는데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군복 같은 옷을 입었는데 총을 들고 샛길로 오는 그 사람을 붙잡고 시비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 윤곽이 잘 나타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거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비탈로 끌고 가더니 꽝하는 총소리와 함께 그 사람이 폭 쓰러졌다. 죽었구나. 또 죄 없는 양민 한 사람이 희생됐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당부락 청년인데 지주의 아들이다. 공산치하에서 아버지가 악질지주라는 죄명으로 살해됐단다. 그래서 보복살해를 한다는 것이다. 백 명을 목표로 총살을 해왔는데(국군을 따라다니면서) 99명을 죽였단다. 백 명을 채우겠다는 것이다. 몸서리가 쳐진다. 보복의 악순환이다. 이것이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그 지주의 아들 후일에 누구에겐 가에 살해됐다는 말을 들었다. 백 명을 채웠는지는 모르지만 인과응보의 원칙인가. 이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갑자기 이 세상이 무서워졌다. 같이 가는 사람들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 없다. 모두가 침통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목적지인 성전경찰지서에 도착했다. 명단에 지장을 찍고 주의사항을 들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는 것인가. 무능한 정부 힘없는 국군의 후퇴로 공산침략으로 피해를 당한 우리가 무슨 죄인이란 말인가. 분노가 솟구쳤지만 어디에도 항변할 곳이 없다. 다만 그들의 당부 밤손님이 나타나면 신고할 것 부역 말 것 등을 다짐하고 돌아왔다. 우리 면은 수복이 늦어지고 있었다. 공비들의 저항세력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결국 경찰이 들어왔다. 면민을 동원, 돌담을 건물지붕높이로 쌓았다. 그리고 지서주위를 뺑둘러 깊고 넓게 파냈다. 그리고 물을 채웠고 외곽에 통대나무로 틈 없이 울타리로 막았다. 그들이 수류탄을 던져도 지서건물 안에 넘어오지 못하게 구축했다. 낮에는 다리를 놓아 출입하고 밤에는 담장 안에서 방어를 했다. 낮에는 경찰이 치안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했지만 밤에는 공비들의 세상이라 지서 안에서 꼼짝 못 한다. 경찰지서가 낮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경찰이 주둔했다가, 밤이면 공비들이 습격 점령하고 인공기를 게양하고 날이 새면 어데론 지 숨어버린다. 밤에 민가에 침입하는 공비들을 밤손님이라고 불렀다. 소수경찰로는 지서를 방어할 수가 없다.


 한 번은 공비들이 습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김대흔씨 집에 습격을 했다. 대흔씨는 이장을 보다가 공산치하가 되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고분고분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리 인민위원장 직을 맡아했다. 그들에게 충성하는 척했다가 국군이 군 소재지까지 진격해 왔을 때 국군에 자수했다. 그들이 그것을 알고 반동분자로 낙인찍어 살해할 목적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김대흔씨는 습격당할 것을 알고서 집 어덴가에 숨어버렸다. 집에서 동생들은 다른데 가있었고 모친과 조부모님이 계셨다. 공비들이 대흔씨 모친을 붙잡아 대흔씨의 행적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들은 대흔씨의 모친을 밖으로 끌고 나가 무참하게 몽둥이로 치고 칼로 찔러 죽였다. 대흔씨는 틈새로 보고 있었지만 대항할 수도 없고 그저 그 처참한 그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당장에 뛰어나가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희생만 더할 것이라 참은 그 순간은 얼마나 괴로왔을까. 천인이 공노 할 노릇이다. 아침에 가서 보니 싸리문에 피와 살점이 튀어 배겼는데 정말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러한 사건이 많았다(비일비재). 보는 앞에서 살상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 와중에도 거창 양민학살사건(50년 12월)과 방위군 부정사건(51년 1월)으로 세간이 떠들썩했고 외신에도 크게 보도되었을 것이다. 공비잔당토벌을 위해 거창에 주둔했던 11사단 9 연대 3대대가 신원면 6개 부락 공비와 내통혐의(식사를 제공혐의)로 청년 백여 명을 내탄골짜기에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몰살시킨 천인공노할 사건이 있었다. 방위군 부정사건은 1.4 후퇴 때 남한의 청장년들을 남하시키기 위해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제정, 만 17세~40세까지를 대상으로 집단남하하는 과정에서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재무, 조달, 보급, 회계 실무자들의 금품 물자 부정유출, 막대한 국고손실과 청장년들을 희생시켰다. 그 죄과로 사령관 부사령관 그리고 주요직에 있던 참모 등 네 사람이 사형되었고 그 외는 중벌에 처해졌다. 10개 연합국 군대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고 있는데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 한국전쟁사에 큰 오점을 남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후대 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승만정권은 북진통일을 염원했지만 트루만정부는 삼차대전을 염려, 이를 제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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