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

걸어도 걸어도

by 나효진

첫 혼술을 클리어한 시모키타자와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전날 밤부터 불안하긴 했는데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도쿄행 짐을 쌀 때부터 마땅한 우산이 없어서 비가 오지 않기만을 바랐건만 역시 도쿄의 초겨울이란... 창문을 열어 두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다음 숙소인 시부야로 가기 싫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낑낑대며 우산을 사는 것 보다는 지금 집 앞 편의점에 갔다 오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에 빗 속으로 나섰는데 다행히도 편의점보다 가까운 곳에 드럭스토어가 있었다. “비닐 벗겨 드릴까요?”라는 일본어를 알아 듣지 못해 바디랭귀지로 소통했다.


우산을 사 왔는데 또 게으름이 도져서 좀 늦게 체크아웃해도 되겠냐고 에어비앤비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는데 원래 사람이 착해서인지 아니면 어제 나한테 잘못한 것이 있어서인지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비가 그쳤다... 장우산 샀는데... 어쨌든 시모키타자와에 사는 동안 가 보지 못했던 미나미구치 쪽 빈티지 가게로 향했다. 가게 주인상들 나만큼 게으른 모양인지 열두시가 되도록 오픈을 하지 않아서 자판기 정식집에 들어가서 돈까스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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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워낙 돈까스를 좋아하는 터라 돈까스만은 맛집에서 먹고 싶었지만 뭐 삶이 언제든 내 뜻대로 되던가.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모르는 남성분들 둘 사이에서 오붓하게 각자 식사 때리고 슬슬 옷을 내 걸고 있는 가게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작년에 롱드레스를 샀던 가게에서 니트 두 벌을 건졌다. 주인 언니의 핑크 메이크업이 여전해서 뭔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또 쇼핑백을 한가득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갈 준비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혼났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체크아웃 시간... 시모키타자와 역으로 들어가 맞은편을 보는데도 상당히 감성에 젖었던 부분이다.


시부야에서의 새 출발을 앞두고 다소 긴장이 됐다. 시모키타자와 숙소 만큼 역과 가깝지 않아서 살짝 걱정했지만 걸음을 가벼이 하려 애썼다. 쇼핑을 위해 반을 비워 왔던 26인치 캐리어는 이미 꽉 차 있어서 몹시 묵직했다. 운 좋게 들어온 급행 열차를 타고 시부야 역에 도착하자마자 밀려드는 인파에 인상이 구겨지려는 것을 참고 구글맵의 지시에 따라 이동해 보려 했지만... 방향을 잡지 못해 마크시티 앞을 왔다리갔다리 하다가 결국 물어물어 버스정류장까지 당도했다. 원래는 시부야 역 8분 거리라는 설명에 걸어볼까 했지만 에어비앤비와 구글맵의 설명에 따르면 버스를 탔을 때 거의 걷지 않아도 되길래 경험도 할 겸 버스를 기다렸다. 살인적인 배차 간격에 우리나라의 교통 환경이 진짜 대박임을 느끼면서...


그러나 이는 이날 펼쳐질 고통의 서막이었다. 분명히 시부야에서 8분 거리라는 설명이 있었는데 구글맵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다이칸야마와 훨씬 가까웠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미 여행 첫 날 시부야에서 다이칸야마까지 걸어가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버스까지 탔으니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탑승 후 10분도 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니 그런데 왜... 어째서 타미힐피거와 이태리 레스토랑과 주유소 뿐인 건지... 또 똑같은 구간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다가 결국 근처 공사 현장에 계신 분께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봤다.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주신 종착지는 주유소였다. 주유소 직원들에게 여기 숙소가 있냐고 물어본들 어리둥절할 밖에... 결국 주유소 사장님까지 나와서 나의 길찾기에 동참했다. 사무실 들어가서 구글맵 프린트해 주고 영어로 설명까지 해 주는데 힘든 가운데서도 정말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구글맵 같은 최고존엄지도도 친절하고 잘생긴 주유소 사장님의 설명도 길치인 내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시부야 역 하차후 길어야 2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반을 걸려서 갔다. 오르막이 으찌나 많던지 캐리어를 당장이라도 내던지고 싶었다. 여행자 티를 안 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건만 미간 찌푸리고 땀 뻘뻘 흘리며 캐리어를 끄는 나는 누가 봐도 이방인일 터였다. 어찌저찌 숙소를 찾았는데 반가움보다는 열이 확 뻗쳤다.


그러나 숙소의 미모를 보자마자 화가 눈 녹듯 풀리고 말았다. 고급 맨션인 데다가 내부도 너무 예뻐서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흡연을 할 수 있는 발코니가 좀 너무 공개적이라는 것만 빼면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미 지칠대로 지친 나는 히터를 빵빵하게 틀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묻은 채 잠이 들고 말았다. 시모키타자와 첫 날 때와 똑같은 루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정확히 네 시 반 기상 후 오늘 일정을 한 번 쓱 훑어 봤다. 당초 이 시간에는 최소 아자부주방에 가 있어야 하지만 이미 나가리였다. 계획을 변경할까 하다가 각각의 예정된 장소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숙소를 나왔다. 평소 한 시간 반 남짓 거리를 걸어 다니는 특훈을 반복한 보람이 있었는지 웬만한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부야에서 출발해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잇초메를 도보로 지나치는 동안 거리와 사람을 마음껏 구경했다. 그리고 아오야마잇초메에서 아자부주방으로 가는 열차에 탔다.


원래는 경양식집 에도야가 유명하다 해서 한 번 가보려 했는데 전날 키치조지 맛집이 문을 닫았듯 아주 공교롭게도 휴무일이었다. 또 아무데나 들어가 보자 하는 마음에 걷다가 갑자기 도쿄타워가 코 앞에 보여서 놀라기도 하면서 고풍스러워보이는 소바집으로 쓱 진입했다. 손님들을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 비싼 식당임을 직감했다. 역시나 가격이 엄청났다. 메뉴는 첫 페이지부터 6천엔을 부르고 있었다. 나갈까 하다가 이런 밥도 먹어 봐야지 싶어 텐동+소바 정식을 주문했다. 2인분은 돼 보이는 양에 놀랐지만 밥 조금을 남겼을 뿐 전부 흡입했다. 다 먹고 나서 소바유를 마시는 법까지 배웠다. 한화로 2만 5천원 가까이 되는 돈을 낼 때는 조금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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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두들기면서 아자부주방을 배회하다가 시로카네다이까지 걸어가 보려고 했다. 그러나 도보 30분이 걸린다는 구글맵의 안내에 이미 걸음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상당했던 나의 발을 우려해 전철을 탔다. 단순히 그곳의 분위기와 생제임스 아울렛과 플래티넘 돈키호테가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이 동네는 8시가 채 안 됐음에도 가게 문을 닫아가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온 김에 이곳저곳 기웃댔다. 도가니가 아파오기 시작할 즈음 멈췄다. 그럼에도 괜히 아오야마잇초메에서 내려 시부야 숙소까지 또 걸었다. 스스로 또라이가 확실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부촌 위주로 다녔더니 나의 행색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쓰레빠 끌고 동네 빠찡꼬나 가야 할 차림이었다. 다음 도쿄 여행 때는 무조건 비싸고 좋은 착장을 하루치 쯤은 가져와야겠다, 살 빼야 겠다는 다짐과 함께 걸어 걸어 오는 길에 본 바로는 시부야 뒷골목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번화가에서 단 몇 발짝만 옮겨도 시모키타자와만큼 조용하고 작은 가게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고민 없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느낌이었다.


서울은 엄청나게 추웠을 때지만 일본은 더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도보 강행군으로 땀 한 바가지까지 흘렸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욕실로 향했다. 보일러 버튼을 아무 거나 눌렀는데 자동으로 따뜻한 물이 욕조에 채워지고 난리가 났다. 입욕제를 풀고 돌아오는 길에 사 온 푸딩을 먹으며 목욕을 했다. 참을성이 부족한 관계로 10분 이상 몸을 담그고 있지는 못하지만 별 것 안 했는데도 몸이 쓰베쓰베해지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다 먹은 푸딩 그릇은 자연스럽게 재털이가 되었다.


목욕을 마친 후 시부야를 어떻게 즐길지 고민을 시작했다. 또 지난해 친구들과 출국 직전 들렀던 키사텐을 떠올리게 됐다. 폐점 50분 전이었지만 괜히 컴퓨터를 들고 나가서 당시 신기해 했던 1인석에 앉았다. 엄청나게 복잡한 와이파이 접속법에 점원을 출동시켜 묻고 또 물었지만 도통 해결이 나지 않아 그냥 핫스팟 잡아 쓰겠다고 했다. 그러나 점원상은 어쩔 줄 몰라하며 미안해 해서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돼 계산할 때까지 그의 미안한 기색은 계속됐다. 괜찮대두 그러네...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24시간 카페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 역시 숙소에 가는 길에 발견했는데, 안 그래도 이번 여행에 포함됐던 일정 중 하나였다. 참고로 일본의 24시간 카페는 패밀리 레스토랑 개념이라 와이파이도 전혀 되지 않고 컴퓨터를 꺼내기도 애매하다. 또 옆자리에서 술파티로 신이 났기에 20분 정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들이 나간 후 컴퓨터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런데 옆자리의 누군가가 우산을 두고 간 것이 아닌가. 편의점 비닐 우산이었지만 달려 나가서 천사 같이 전달해줬건만 고맙다는 소리를 듣지 못해 서운했다. 어쨌든 시켜뒀던 감자튀김, 무한 리필 음료와 함께 이날 일기를 쓰고 집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다. 항공권 리턴 연장을 고민하기 시작했던 날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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