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혼술 도전
전날 피곤해서 11시쯤 누웠지만 1시경 잠들었다. 여행은 돈과 시간을 바꾸는 것이라는 주의라 일찍 일어나서 이것저것 하려 했지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람 울리면 끄고 다시 맞추고 또 울리면 또 끄고 맞추고 하다 보니 12시가 돼 있었다. 아침부터 도쿄 서쪽 빈티지란 빈티지는 다 털려 했건만...
그런데 가게 자체가 12시 정도에 열기 때문에 이 정도 게으름은 괜찮다고 합리화한 후 코엔지로 나섰다. 또 코엔지에 어디가 맛있다는 정보는 주워들어가지고 가려 했지만 월요일 휴무... 강제 무작정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키나리 스테이크가 보이길래 이키나리 식사를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인들 말이 잘 안들렸다. 뭐라 하는지도 모르고 네 그거 주세요 네 네 네만 반복했고 점원상이 알아서 가져온 스테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잘 먹고 계산하려는데 점원상이 자꾸 포인트 카드를 만들라고 권유해서 저 외국인이라서... 라고 하고 나왔다. 내가 포인트 카드 만들어서 뭣할 것인가... 배도 찼겠다 빈티지 가게를 샅샅이 뒤지는데 정말 별것이 없었다. 엄청 싸지도 않고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빠르게 키치조지로 이동하기로 했다.
키치조지가 의외로 번화가여서 조금 헤맸다. 원래는 빈티지 가게 한 번 쭉 털어 주고 이노카시라 공원을 구경할 계획이었지만 공원부터 찾아 버려서 체력이 점점 오링나기 시작했다.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곳곳을 탐방하는데 역시나 지갑은 열리지 않았다. 가게들이 전부 작아서 낯가리는 나에게는 레벨이 좀 높았다. 그래서 얼른 시모키타자와로 돌아왔다.
전날은 보지 못했던 시모키타자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앞으로 또 도쿄에 온다면 다시 여기서 묵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가 작은 듯 큰데 알차기는 또 엄청나게 알찼다. 다 돌았다고 생각했을 때 또 새로운 것들이 나왔다. 한 세 시간을 쇼핑해도 볼거리가 끝나지 않았다. 밥도 못 먹고 두 손에 쇼핑백만 점점 늘어나는데 슬슬 가게들이 문 닫을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2층에 있어서 갈까말까 했던 가게에서 정말 예쁜 브랜드 구두 두 켤레를 득템했다. 갑자기 ‘꽃보다 남자’의 시즈카가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좋은 구두는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거라고.
해는 애저녁에 졌고 시간은 아홉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밥집 막차 시간이었다. 그래서 문 연 가게를 찾아다니는데 힘들어서 무턱대고 들어간 곳이 내가 싫어하는 카레집이었다. 사람이랑 말을 하도 오래 안 하니까 점원이 흡연석 앉으실 거냐고 묻는데 응응응 이라고 해 버린 부분이다... 수프커리에 햄버그를 토핑해서 먹었는데 배고파서인지 원래 맛있는 음식인지 너무 잘 먹었다. 밥을 제일 적은 양으로 시켰는데 후회했다. 정말 그렇게까지 적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남자 점원상이 너무 귀여워서 맛있었던 것일 수도... 여자 점원상은 굉장히 영어를 쓰고 싶어 했는데 그가 영어로 물을 때마다 나는 일본어로 대답하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됐다. 아무튼 이 근처에 혼자 술 마실 곳이 있냐고 묻자 미나미구치 쪽을 가리켰다. 그렇다. 내 숙소가 니시구치여서 여태 미나미구치 쪽에 소홀했지만 진짜 불야성은 그 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충 분위기 확인하고 짐은 놓고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쉬면서 티비를 켰는데 스마스마를 하고 있었다. 스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뭉클했다. 비스트로 끝나고 옛날 스맙 영상들을 오래 틀어주는데 영원한 것은 없는가 싶어 좀 울컥해 버렸다. 그리고 11시 쯤 생애 첫 혼술에 나섰다.
역시 떠들썩한 분위기의 술집에 들어가기엔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나미구치 쪽을 돌고 돌다가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 바로 진입했다.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너무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말을 걸어 준 착한 주인... 이날 안주(츠마미)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다. 뭔가 난 술 시켰으면 안주를 꼭 시켜야 할 것 같아서 추천해 달라니까 배고프냐고 해서 안 고프다고 하니까 카리카리포크라는 걸 권했다. 나온 거 보니까 그냥 햄이었지만 맛있게 먹나 안 먹나를 너무 지켜 보셔서 맛있는 척을 했다. 엄청 짰다.
첫 잔은 오리온 맥주. 정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알콜쓰레기이기도 하지만 술은 맛이 없어서 먹지 않는 데다가 친구들이랑 만나도 무조건 카페를 가는 사람이지만 타국에서 혼자 먹는 술이 그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다. 일본어가 짧아서 반말 비슷하게,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첫 혼자 여행이라고 말하니까 같이 있던 손님도 대단하다고 빈말을 해 줬다. 아뇨 제가 할 정도면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지 분위기를 마시는지 모를 상황에서 한 잔을 더 주문하려고 메뉴를 부탁했다. 또 주워 들은 게 있으니 하이볼을 시켜 보려고 하는데 가쿠하이볼과 류큐하이볼이 있었다.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류큐하이볼을 다음 잔으로 결정했다.
더 이상 주인도 말을 걸지 않고 혼술 미션 클리어 했다는 생각에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취기가 올랐다. 딱 기분 좋을 만큼 취한 후 계산하고 나서는데 사양 말고 다음에도 와 달라는 빈말을 들어도 행복했다. 숙소로 가는 길도 구글맵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익었다. 현지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느덧 시모키타자와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 숙소는 시부야였는데 웬지 가기가 싫어질 만큼 좋은 기억들이 남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