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 개고생으로 시작하다
의외의 순발력이 나올 때도 있지만, 돌발 상황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처음 나홀로 여행을 맞아 여유있게 동선을 짰다고 해도 오히려 그 준비되지 않은 여유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동네를 나서더라도 어느 정도 계획이 필요한 내게는 말이다.
까만 새벽 등산객들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김포공항을 밟았다. 한산한 공항에서 핫초코를 마시면서 체크인 카운터 오픈을 기다렸다. 차가운 도시 여자가 된 기분... 비행 시간은 한 시간 반이었다. 그야말로 출퇴근 시간 우리 집에서 광화문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덜 소요되는 셈이었다. 전날 2시까지 짐을 싸느라 고작 한 시간 정도를 잤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열심히 사육당하면서 하네다에 도착했다.
당초 일본 유심을 사 가지고 인터넷 전화번호를 부여 받아 착신전환을 하겠다는 완벽한 계획이 있었으나 역시 난관이 시작됐다. 일단 착신전환은 미리 한국에서 통신사 측과 연락해 하고 가야 한다. 그런데다가 유심 상품을 잘 못 사는 바람에 번호도 부여받지 못했다. 내 아까운 2200원... 입국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끙끙대다가 일단 숙소로 가자는 생각에 시부야로 향하는 리무진에 올랐다. 원래는 11시 45분 리무진 탑승이 목표였으나 한 30분이 오버됐다. 리무진에 타서도 열심히 유심을 만지작거렸는데 하늘이 감복했는지 간단히 연결됐다. 그리고는 곯아 떨어졌다.
첫 숙소는 시모키타자와였다. 빈티지를 좋아해서 일본에 갈 때마다 시모키타자와를 들르려 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며칠이라도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숙소를 정했다. 도쿄는 한글패치가 제대로 돼 있기 때문에 이동에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오히려 예상 시간보다 빨리 시모키타자와에 도착했다. 그러나 출구 찾기부터 보통이 아니었다... 서쪽 출구에서 단 1분 거리인데 남쪽 출구 표시가 눈에 띄길래 나갔더니 이런 맙소사... 우리나라처럼 어디로든 나가면 통하겠지 생각했다간 큰코 다칠 수 있다. 여행자의 친구 구글맵을 켰지만 사용도 미숙했고 원체 길치라 그 좁은 동네에서도 한참을 헤맸다. 커다란 캐리어의 덜덜거리는 소리가 무척 민망했다. 관광객 티를 내고 싶지 않았건만...
30분 정도를 헤매다가 겨우 숙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호스트와 연락이 닿질 않는 것이었다. 전날 체크인을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답이 없길래 뭔가 방법이 있겠거니 하고 있었지만... 초인종 누르고 짧은 일본어로 음성 메시지까지 남겼거늘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에어비앤비에 전화를 걸었다. 유심 사용은 어려웠지만 그나마 무료통화 60분을 등록하고 가지 않았다면 정말 피눈물을 흘릴 뻔했다. 에어비앤비 측의 응대는 무척 친절했다. 그러나 그쪽도 일단 호스트와 연락이 돼야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인데다가 남의 집 앞에서 계속 기다리다가는 신고당해서 잡혀갈 수도 있는지라 우선 시모키타자와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있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부터 시모키타자와의 캐리어를 끄는 여자가 돼서 적당한 카페를 찾아다녔다. 또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서 ‘아무 거나’가 잘 안 되는 성정 탓에 오래도 걸었다. 아직 한국 물이 덜 빠졌던 때... 어쩌다 스타벅스를 발견했지만 역시 만국 공통 금연인 터라 끽연가능 네 글자만 보고 한 카페에 들어갔다. 그 정신에도 아이스 커피와 초콜렛 케익까지 주문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니 조금은 진정됐지만 사진이고 나발이고 일단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 상황을 알렸다. 쇼핑하려고 일부러 반은 비워 왔지만 그 큰 캐리어를 끌고 몇 시간을 돌아다녔던지라 허리까지 아파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첫날을 날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짐을 코인로커에 넣어두고 어디든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런데 만약에 시모키타자와 역에 코인로커가 없다면? 더 이상 거리를 헤매다가는 그냥 하네다로 돌아가서 출국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카페 사장님에게 조심스럽게 혹시 시모키타자와 역에 코인로커가 있을지를 여쭤봤다. 잠깐 스몰토크를 나눈 후 너무나 친절하게도 바로 “알아봐 줄게요”라고 해 주었다. 사장님 조사 결과 시모키타자와 역에는 코인로커가 있었고 이제 가서 맡기기만 하면 됐다. 어쩌다 흘러들어온 거라 또 역까지 가기가 두려웠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게 계산하고 가게를 나간 순간 호스트에게 연락이 왔다. 집 비밀번호를 알려 주길래 하.. 됐구나 하고 숙소까지 쪼르르 갔다. 비번만 알면 끝났다고 생각했다.
도착해서 보니 그게 현관 비밀번호가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이제 모두 도어락을 쓰지만 일본은 대부분 열쇠로 문을 연다. 그 열쇠를 자물쇠 모양으로 된 로커에 넣어 뒀다는 건데 내가 그걸 한방에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한참 머리를 굴리다가 뭔가를 걸어둘 목적이 아닌 듯한 큰 자물쇠에 접근했다. 그러나 남의 집 자물쇠였고... 그래서 처음에 자전거를 묶어 둔 자물쇠라고 생각했던 것을 만지기 시작했다. 열렸다.
겨우 집으로 들어오니 너무 예쁘고 만족스러워서 그 동안의 힘듦과 열받음이 눈녹듯 사라졌다. 잠깐 침대에 누웠더니 나가기가 싫어졌다. 30분 정도를 까무룩 잠들고 일어나니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배도 고파왔다. 이렇게 된 거 이번 여행의 모토인 ‘무작정’ 정신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캐리어를 끄는 여자였던 때 봤던 우나기 집을 떠올렸다. 무작정 나섰다.
장어 먹고 기운을 차리자 싶어 들어갔는데 장어는 현재 쉬고 있다고 했다. 정말 초로컬 분위기였다. TV에선 만담이 나오고 있고 나이 지긋하신 주인 내외와 단골 할아버지가 신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일단 장어가 안 된다 하니 제일 싼 스시 메뉴를 시켜 봤다. 수세미 조각과 함께 나온 스시는 정말 두툼하고 컸으며 무엇보다 타마고야끼가 최고로 맛있었다. 사진이고 뭐고 정신없이 흡입하다가 너무 게걸스럽게 보일까봐 속도를 늦추고 꼭꼭 씹어먹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단골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내게 “맥주 마실래?”라고 말을 걸어 오는 것이었다.
뭔가 더럽다기 보다는 정말 귀여운 상황이었다. 주인 내외는 “식사만 하러 오신 것 같아요”라며 젊은 여자분이 오랜만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 같다고 애써 커버쳐 주는데 뭐 그때까진 나도 현지인과 그렇게까지 어울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웃고 넘겼다. 식사 마치고 나가는데 할아버지가 다음에 또 보자며 두 번째 만나면 친구를 하자고 했다.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서 꼭 그러자고 하고 이동하려는데 주인 할머니가 미안하다며 ㅋㅋㅋㅋㅋ 괜찮습니다...
어느새 저녁은 밤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시모키타자와에서 옷 구경이나 할까 하다가 당초 예정대로 다이칸야마와 나카메구로로 발길을 옮겼다. 시모키타자와에서 시부야까지 갔다가 한 번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시부야에서 하차했는데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곳에 인파가 엄청났다. 왜인고 하니 딱 할로윈 시즌이어서였다. 역에서 보이는 스크램블 교차로에 새까만 머리들이 버섯처럼 솟아서 좌로 우로 이동하는데 다들 사진 찍고 난리였다. 그래서 환승하려던 것을 멈추고 즉흥적으로 역 밖으로 나갔다. 사람 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어디에 앉아서 보지 않는 이상 무리였다는 것을 3분 만에 깨닫고 다이칸야마까지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시부야를 조금만 비껴도 호젓한 도쿄의 밤길을 걷는데 여기서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걷던 중 다이칸야마 역까지 쉽게 도착하니 도쿄 전문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카메구로는 바로 옆이니 거기도 한 번 걸어가 보자 싶어서 이동하려다가 러쉬가 보이길래 가다 말고 입욕제를 샀다. 자쿠지 욕조에서 오후로를 하겠다는 야심차면서도 갑작스런 계획이었다. 그리고는 걸었다. 저 멀리 메구로가와가 보였다.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 ‘최고의 이혼’ 속 장면장면들이 스쳤다. 에이타와 오노 마치코가 티격태격하던 한겨울의 메구로 강변을 지금 내가 걷고 있다. 부끄러워서 셀카도 찍지 않았던 나였지만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누를 수밖에 없었다. 울컥하고 찡했다. 검고 얕고 맑은 물이 흐르는 가운데 강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건물들의 풍경이 그곳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것 같았다. 뭣 모르고 한 바퀴를 돌아 보려 했는데 끝이 없길래 구글맵을 확인해 보니 그대로 가다가는 1시간은 더 걸어야 했다. 오버하지 않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일반인 집이라 해도 에어비앤비니 어메니티들이 대강은 갖춰져 있을 줄 알았건만 샴푸 층이 분리돼 있을 정도였다. 치약도 없었다. 사러 나가기가 너무 귀찮아서 폼클렌징으로 머리를 감고 비치돼있던 가글로 양치를 했다. 그리고 러쉬에서 샀던 입욕제를 풀고 본격 오후로를 시작했는데 신기하리만치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싹 풀렸다. 온몸을 감싸는 사향이 사람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내내 잠도 못 자고 몸을 썼더니 머리가 아팠다. 한국에서도 11시에 잠든 적이 없건만 자야 할 듯했다. 지갑을 확인해 보니 7천엔도 쓰지 않았다. 스이카 충전 3000엔 빼고도... 다음날은 돈을 펑펑 쓰겠노라고 마음먹으며 도쿄에서의 첫 날을 마무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