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

뜻밖의 스타벅스 투어

by 나효진

늦잠은 어느새 공식이 됐다. 시부야에서의 둘째날은 아침부터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가 내려다 보이는 스타벅스에서 우아하게 라떼 한 잔을 하고 거리를 둘러본 뒤 도쿄역에 갔다가 긴자와 닝교쵸까지 들를 생각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오전의 잠과 맞바꾼 계획이 되어 버렸다. 침대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숙소 위치가 정확히 시부야와 다이칸야마 사이임을 떠올렸다. 이미 여행 첫날 다이칸야마와 나카메구로의 밤을 만끽했지만 이곳들의 낮도 궁금했다. 대표적 부촌이지만 아자부주방이나 시로카네다이랑은 다소 다른 느낌의 다이칸야마에서 키츠네나 메종 드 리퍼를 구경하며 잠시나마 니혼 패션 피플들의 모습도 감상하고 싶었다.


이쯤 되면 몸이 길찾기를 거부하거나 걷고 싶어 두뇌를 지배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키츠네를 구글맵에 찍고 움직였음에도 헤매고 말았다. 어차피 걸을 운명이었던 것을 더는 거부하지 않기로 하고 발 닿는데로 움직이는데 그 유명한 다이칸야마 츠타야+스타벅스가 등장했다. 그때부터 나의 스타벅스 투어가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워낙 멋진 사람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진 터라 쓱 둘러봤는데 썩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서 옷가게나 돌아다니려고 나온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실은 숙소에서 나올 때부터 한 방울씩 맞았는데 우산의 무거움과 방사능비 노출을 저울의 양측에 달고 고민하던 중 후자를 택했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도 내가 건물 안에 들어가면 비가 그치고 나오면 내렸다. 가죽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끝까지 개겨 보려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르꼬르동블루 카페에서 잠시 쉴까 하다가 온 김에 츠타야 스타벅스에서 허세 좀 부리고자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원체 항상 많은 곳이라 핫초코 벤티 사이즈를 시켜 놓고 기다리는 동안 불안했지만 다행히 창가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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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같은 정보를 보고 온 사람들인지 한국인들이 무척 많았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애써 현지인인 척 하려 노력했다. 막상 창가에 앉았지만 할 것도 없고 적금 자동이체 잘 빠져나갔나 확인하고 코코아를 원샷하다시피 한 뒤 에비스로 걸어갔다. 물론 내가 스타벅스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비가 떨어졌다.


다이칸야마에서 에비스로 죽 걷고 있는데 눈에 띄는 가게가 있었다. 걸음이 워낙 빨라서 지나쳤는데 지금 안 들어갔다간 뭔가 득템의 기회를 놓치는 기분이어서 되돌아갔다. 역시나였다. 스웨이드 캠퍼부츠를 미친듯이 싼 가격에 건져 갖고 나왔다. 길눈은 어둡지만 쇼핑 스팟을 찾는 촉만은 쇼핑왕 루이급이라고 자신한다.


에비스에 온 김에 많은 이들이 인생라멘을 먹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아후리를 찾았다. 내 기준 생각보다 비싸고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바 자리에 앉아서 먹는 바람에 요리를 내 주신 분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맛이 별로였어도 반을 넘게 비울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불만족스럽지만 배는 불렀다. 부츠는 만족이었지만 무거웠다. 집에 짐을 두고 나오기 위해 다시 걸었다. 또 비가 내렸다. 에비스 - 다이칸야마 - 시부야 숙소까지 빗방울과 함께 했다.


쇼핑백을 놓고 원래 아침에 가려고 했던 시부야 츠타야 스타벅스를 갔는데 명소는 명소였던 모양인지 외국인들 천지였다. 자리는 당연히 없었다. 나와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다이칸야마에서도 그랬듯 백화점이나 편집숍은 재미가 없었다. 이 와중에 양말에 구멍이 난 듯한 기분이 들어 확인해 보니 진짜였다. 그래서 포에버21에 들어가 양말 한 묶음을 사고 지나가는 길에 러쉬를 발견해 오늘용과 내일용 입욕제 두 개를 샀다. 그리고 드라마 투어를 위해 도쿄역으로 향했다. 인생드라마 ‘아네고’와 ‘파견의 품격’ 촬영지들을 몸소 둘러보는 것이 목표였다.


오피스 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도쿄역이야 도착만 하면 보이니 문제가 없었지만 일본 직장인들을 구경할 목적으로 가려 했던 마루노우치 츠타야 스타벅스를 찾다가 또 한 번 HP를 격하게 소모했다. 도쿄역 근방에서 꼭 가보라던 킷테나 브릭스퀘어는 내게 잠실롯데타워랑 별 차이가 없었다. 도쿄역 저녁 풍경이나 찍고 히비야로 이동했다. 아네고와 쿠로사와가 첫 키스를 한 건물을 꼭 가보고 싶어서였다. 당시의 체력으론 결코 만만하지 않은 거리였지만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퇴근 시간 히비야에서는 시부야 못지 않은 인파가 목격됐다. 이 와중에 스타벅스를 발견해서 들어갔다. 줄이 길었다. 일본 스타벅스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짐을 자리에 놓고 주문을 하면 야만인이다. 점원에게 예약석 푯말을 받아서 자리에 두고 주문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야만인이라 선 착석 후 푯말 획득하고 프라푸치노를 시켰다. 하도 걸어서 목이 탔기 때문에 프라푸치노를 원샷하다시피 하고 다리를 주무르며 사람 구경을 했다. 사람 구경은 그냥 걸으면서 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조금 쉬다가 히비야 공원으로 향했다. 히비야 공원은 사실 사와키 에리카가 아네고에게 고민 상담을 하던 곳이었는데 쿠로사와와의 첫 데이트 장소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비가 제대로 왔다. 그럼에도 공원 곳곳을 훑고 히비야 시티를 찾아 나섰다. 더는 우산이 없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빗방울이 굵었다. 그래서 전단지를 뒤집어 쓰고 담배라도 피우려고 한 건물을 기웃거렸는데 그곳이 운 좋게도 히비야 시티였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아네고가 회식 후 혼자 신나서 2차 가자고 뛰어 올라간 계단,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간 쿠로사와가 회사와 함께 상처받는 아네고를 향해 “정의의 편에게”라며 키스를 날린 구조물 앞이 보였다. 처음에는 아리까리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드라마를 확인해 보니 그곳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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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피로에 흠뻑 젖어 지친 몸을 이끌고 굳이 낮에 실패한 시부야 츠타야 스타벅스에 가서 기어코 창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창가도 창가 나름이었다. 뷰가 몹시 구렸다. 30분 정도 앉아 있다가 결국 경치 좋은 자리 뒤에 가서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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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 번 구글맵을 켠다면 너는 정말 답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만만하게 걸었지만 나는 노답인 녀석이었다. 그래도 집에 도착해 어제 샀던 입욕제를 풀고 목욕을 하는 귀여운 사치까지 부리고 나니 시부야의 마지막 밤이었다. 이대로 쉴 수 없어서 또 나왔지만 역시 일본의 폐점시간이란 너무 빠른 것이었다. 그나마 12시까지 하는 엑셀시오르 커피를 찾아서 아이스 라떼 큰 잔으로 시켜 놓고 컴퓨터를 켰다. 흡연실은 긴 테이블 하나와 좌석 두 어개가 마련돼 있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이래도 신경 안 쓰이나 싶을 만큼 다닥다닥 붙어서 컴퓨터를 하거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나도 끼어들어서 일 하는 척을 하면서 페이스북을 했다.


남은 것은 혼술 미션이었다. 집을 오다가다 하면서 봤던 술집이 몇 군데 있었다. 진지하게 항공권 리턴 연장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술을 마시면서 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여유를 부리며 스파클링 와인을 하나 시켰지만 마음은 초조했다. 먼저 숙소 주인에게 하루 더 묵어도 되냐고 묻고 허락을 받았다. 남은 것은 항공사. 아시아나 국제선 고객센터는 24시간 운영한다고 하길래 전화를 걸어 봤더니 상담원 부재중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와서 새벽 4시까지 관련 정보를 찾다가 잠이 들었다. 5시 30분에 업무를 시작하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기 위해 6시 30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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