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눈물의 이별
이 밤의 끝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다가 불가항력으로 잠들어버린지 세 시간 반이 지나고 겨우 맞춰 놓았던 알람이 울렸다. 조식 먹으러 가야 되는데... 다시 9:35로 알람 시각을 수정하는 순간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간밤에 바 사장이 준 데킬라 두 잔 원샷의 타격이 컸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일찍 일어나서 조식 먹고 아침 영화를 한 편 더 봤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일어났다. 이럴수가 거울을 보니 한참 두드려 맞은 듯한 얼굴이 있었다. 정말 창피해서 나가기가 싫었지만 꾸역꾸역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쪽팔려서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조식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감 10분까지 열심히 먹고 빛의 속도로 씻은 후 캐리어를 잠그는데 20키로는 족히 넘을 각이었다.
11시 체크아웃 후 짐을 맡기고 영화를 한 편 더 볼까, 당초 계획대로 후추공원에 갈까를 고민했다. ‘아네고’에서 아네고가 쿠로사와에게 청혼했던 그 분수가 후추공원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몽땅 나오는 ‘데스노트’도 보고 싶었지만 한국에 수입되리라 믿고 과감히 후추공원을 택했다.
후추공원은 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는 편이다. 완행열차 기준 40분 가량이 걸린다. 그러나 신주쿠에서 운 좋게 쾌속전철을 타서 공원과 나의 거리는 신속하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쾌속은 내가 내려야 할 역에 서지 않는 관계로 전철을 갈아 타는데 또 잘못 탔다. 예상대로였다. 한 번 쯤은 실수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저 빨리 깨달았다는 점만으로도 감사했다.
후추공원에 내리자마자 일본 특유의 밥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간만에 번화가를 벗어나서 맑은 공기를 마시니 발과 다리는 죽을 맛이라 아우성치지만 기분은 좋았다. 땅덩어리가 큰 만큼 거대한 공원을 가로질러 걷는데 저 멀리서 분수가 보였다. 감동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눈물이 터졌다.
혼자 울컥해서는 눈물을 훔치면서 카메라 셔터를 연거푸 눌렀다. 분수 맞은편에서 아네고와 쿠로사와가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이는 듯하고 두 사람이 앉았을 분수 구석에 앉아서 멍하니 햇볕을 받는 것만으로도 오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후추공원에 머무르다가 신주쿠로 돌아왔다. 원래는 시부야 카페에 가서 글이라도 써 볼까 했는데 짐과 몸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신주쿠에서 리무진을 타기로 마음 먹었다. 친구가 부탁한 엽서를 사기 위해 신주쿠 우체국에 갔다가 꼭 들르고 싶었던 돈까스 맛집으로 향했다. 점심 마감 3시, 2:20 출발. 가까스로 20분 만에 도착해서 식사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마감 직전에 착석을 한 터라 약간 눈치가 보였다. 정식이 무려 1800엔이길래 덮밥을 시켰더니 내가 싫어하는 카레가 나왔다. 너무 뜨거워서 혀가 얼얼했지만 흡입했다.
호텔에서 짐 찾기 전 마지막으로 한 시간 정도 도쿄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장소가 필요했다. 십 년 전 신입생 때 갔던 카페 같은 분위기의 찻집이 보였다. 사실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심플하게 ‘커피 쿨’ ‘연중무휴’라고 적힌 것이. 들어가서 창가자리에 앉으니 가부키쵸 뒷골목 경치가 내려다 보였다.
밥 먹고 나와서 커피가 땡기긴 했지만 여기서는 메론소다 같은 낡은 느낌의 음료를 시켜야 할 것 같아서 주문했다. 그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감성의 시간을 보냈다. 호텔에 맡긴 짐을 찾고 신주쿠를 떠나는데 정은 붙이지 못한 동네였지만 슬퍼졌다. 한껏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고 가장 가까운 리무진 탑승 장소로 향했는데 잘 찾아갔음에도 타지 못했다. 예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표를 즉석에서 구매해서 탈 수 있는 터미널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캐리어와 함께 필사의 질주를 했다. 택시도 지하철도 아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초보 여행자다 보니 아주 넉넉하게 공항에 도착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다소 아슬아슬해 보이는 시간대의 리무진 표를 끊고 나니 시간이 남았다. 흡연 천국 일본 터미널에 흡연실이 없어 한참을 돌아다녔다. 겨우 한 대를 피우고 무사히 리무진에 탔는데 다시 눈물이 솟았다. 이 역향수가 오래 갈 것만 같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신주쿠 풍경 한 장면 한 장면이 아쉬웠다.
비행기 이륙 두 시간 전 쯤 도착한 하네다는 너무도 한산했다.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면서 리무진을 탈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공항 내 흡연 가능 카페에 앉아 밤하늘과 대기 중인 비행기들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이미 도쿄라는 도시에 푹 빠진 나는 몹시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이곳에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출발 두 달 전부터 짰던 일정을 가만히 확인해 보니 지킨 것이 거의 없었다. 삼일 밤낮은 죽은 듯 자야 할 만큼 체력도 바닥났다. 100만원을 바꿔갔는데 단 1000엔이 남았다. 그런데도 상상 이상의 행복감이 밀려왔다. 30년 동안 스스로의 호불호에 대해서는 완벽히 정리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나 자신의 여러 모습들을 또 다시 발견했다.
돈과 시간, 사진 찍어주실 분만 있다면 배두나 도쿄놀이보다 재미있는 도쿄장난 같은 책을 여러 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지하게 도쿄에서 체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어차피 내가 여기서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은 휴가 때문이었다는 슬픈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여기서 산다고 9시부터 6시까지 일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정이 없을 때는 일감을 들고 와서 이 곳에서 일을 해도 좋겠다는 무모한 결론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정확히 한 달 반만에 실현된 것을 보고 나는 또라이가 맞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