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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Apr 07. 2017

도쿄 체질

2017.3.16~3.25 ①

만 30살 생일은 어떻게든 벚꽃과 함께 도쿄에서 맞고 싶었다. 4월부터는 일을 제대로 시작하게 될 줄 알았던 나는 주말을 끼고 위험한 도쿄행 플랜을 짰다. 생일은 4월 10일 월요일, 도쿄의 벚꽃 만개 시기도 어중간하게 비껴나 있고, 여행 직후 바로 일을 하기도 애매한 날짜다. 그렇다고 회사에 가기 위해 월요일 새벽부터 부랴부랴 서울에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다. 소속된 회사도 없는 주제에 반차와 월차 등 다양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10일 하루 쯤은 월차를 낼 수 있겠지, 하면서 4월 7일 밤 out 10일 낮 in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러던 중 차라리 4월부터 깔끔히 새 출발을 하는 대신 3월에 길고 느긋한 여행을 즐기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려 9만원이라는 거금을 손해보고 사 두었던 티켓을 취소, 3월 비행기를 예약했다. 출발까지 1주일 반을 남겨두고 티켓을 알아본 탓에 가격이 거의 40만원에 육박했다. 평소에는 비싸게 느껴졌던 JAL과 ANA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시간대도 매우 괜찮았기 때문에 생애 처음으로 국적기가 아닌 비행기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에게만 도쿄로 간다고 연락을 해 두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행동에는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일단 내가 그들에게 준 만큼의 관심이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는 미성숙한 서운함이 컸다. 어쩐지 이 시부야구의 조그만 동네라는 그룹에서 귀찮은 존재가 된 것 같은 자격지심도. 어릴 때부터 미움 받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속 좁은 땡깡을 자존심으로 가리며 살아 왔다는 사실이 상기됐다. 친구의 반응은 다행히 만족스러웠다. 모두에게 전해 둘게. 이들을 보러 도쿄를 다시 찾았을 때 들었던 ‘おり’라는 말 만큼 반가웠다.


9박10일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그곳에서 보낸 하루하루를 한 편의 글로 만들기 힘들 정도로 딱히 한 것이 없다. 정말로 매일 술을 마신 것 이외에 한 게 없기도 하지만, 공개적인 장소에 적기 부끄러운 감정들이 잔뜩이었다. ‘치욕’의 의미보다는 ‘수줍음’에 가깝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질려 버린 지 수 년, 도쿄에서 다시 그 일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30년 동안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가 다시 보였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부끄러웠다.


우선 요약하자면, 도쿄에서의 내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 없어 보일 듯하다. 도착날을 제외하고, 보통 12시에서 1시 정도까지 잠을 잔다. 내게 오전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시에서 3시까지 침대 위를 굴러다니다가 억지로 씻고 대체로 시부야구 일대를 걸어서 돌아다니며 밥을 먹거나 고슈인을 받으러 다닌다. 그러다가 해가 지면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해가 뜰 때까지 마신다. 그러면 12시에서 1시 사이라는 기상 시간도 늦은 것이 아니다. 이런 생활을 9박10일 동안 반복했다. 한국에서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기 때문에 간을 깨끗하게 해 둔 보람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직전 여행에서는 결국 마지막날 숙취로 추태를 부렸지만, 이번에는 10일 동안 조금도 숙취가 없었다. 다만 정말 몸에 수분이 부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인데도 도쿄에서는 슈퍼에서 매일 에비앙이나 볼빅을 잔뜩 사들였다.


첫날은 어마어마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우선 길치 출신인 나의 엄청난 발전을 자랑해 보겠다. 나는 포켓와이파이보다 유심을 선호하는데, 시중에서 판매하는 일본 유심의 유효기간은 장착일 포함 8일이다. 나의 체류기간은 9박10일이기 때문에 두 개를 사는 것은 낭비고, 최대한 아껴 쓰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고로 한 이틀은 한국 유심을 끼운 채 개방된 와이파이를 써야 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하네다는 1회 300분 짜리 와이파이가 있고, 시부야에 가기만 하면 109나 역 등지에서 외국인에게 지역 한정 인터넷을 무료로 제공한다. 리무진을 타기 전까지 숙소 위치와 찾아가는 방법 등을 캡처해 두고 승차하자마자 곤히 잠들었다.



그렇게 리무진 종점인 마크시티에 도착. 이제 시부야구는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숙소까지 가는 방법은 다양했다. 걸으면 20분, 전철을 타도 그 정도는 걸린다. 23kg짜리 캐리어를 끌고는 힘들다. 택시는 뭔가 돈이 아까웠다. 버스를 타면 숙소 코 앞에서 떨어뜨려준다는 것을 알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아주 살짝 헤매긴 했지만 인터넷 없이 물어물어 정류장에 도착했고, 별 어려움 없이 탑승까지 마쳤다.


내린 정류장에서 1분 거리. 그러나 1분이 아니었다. 1분이려면 나는 6차선 대로를 무단횡단하거나 날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육교가 보였다. 잠깐 셀룰러 데이터를 켜서 위치를 재확인한 후 너무나도 순조롭게 목적지 부근까지 다다랐다. 토미가야 잇쵸메, 번지수는 23어쩌구. 눈 앞에 23이라는 숫자가 적힌 건물이 보였다. 지난해 10월말 처음 에어비앤비를 이용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편하게 체크인한 기억이 없었던 나는 감개가 무량해 콧날이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바로 열쇠가 들어 있다는 우편함으로 향했다.


호스트는 분명 101호라고 했는데 101호가 아니라 1A, 1B, 1C로 되어 있어서 조금 당황했다. 일본 맨션 우편함에 자체적으로 달린 자물쇠는 아직도 쓰는 방법을 모르겠다. 어떻게 해도 안 되기에 손을 집어 넣어보니 열쇠지갑이 잡혔다. 럭키... 대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방 문에 호수가 적혀 있지 않았다. 일본 책 오른쪽부터 읽으니까 맨 우측의 방이 101호겠거니 하고 열쇠를 구멍에 집어 넣었는데 열리지 않았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신고감이 아닌가. 어쨌든 여긴 아닌 것이니 가운데가 101호일리는 없고 맨 왼쪽 방으로 가서 키를 돌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렇게 쉽게 체크인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방의 전경이 사진과 조금 달랐다. 호스트 녀석... 이렇게 사기를 치나, 라고 생각하며 문을 닫았는데 방이 이상하게 지저분했다. 침대 위에 코트 따위의 옷가지가 널려 있거나 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온몸에 오한 같은 소름이 끼쳤다. 황급히 커텐을 젖혀 베란다를 보니 빨래가 잔뜩 널려 있었다. 조땠구나...


23만 보고 흥분해서 옆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아... 제발 도어락 같은 것 좀 보급하면 안될까? 포스트박스에 열쇠 넣어 두려면 깊이 좀 넣고... 1A호 거주민 분께는 본의 아니게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진심 여행 첫날 일제 은팔찌 득템해서 추방당할 뻔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바로 옆에 있던 진짜 내 숙소는 101호라고 해 놓고 한층을 올라가야 해서 짐을 나르느라 죽을 뻔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말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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