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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Oct 06. 2017

도쿄 별일

2017.5.25 ~ 2017.6.1 ③

후지소바에서 집에 돌아와 자고 일어났더니 또 약속이 있었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모 양과의 만남이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애다. 오모테산도에서 만나 브런치를 하려는데 가게 찾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비어있는 곳에 들어갔다. 적당히 작을 줄 알고 미니버거를 시켰더니 너무 미니였다. 한 4년 만에 보는 거라 쌓인 이야기도 많았다. 전날의 여파로 나는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지만 오샤레한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돈 많이 버는 얘가 다 쐈다.


집에 돌아와서 조금 개기다가 술집으로 갔다. 주말동안 이 바의 2주년 이벤트가 열렸다. 꼭 이렇게 뭔가 있을 때 도쿄를 방문하게 된다. 마침 벌떡주가 제주도로부터 도착해 있어서 원래 주려던 감독에게 선물하고 오늘은 좀 일찍부터 디제이를 맡아서 모두와 가라오케 타임을 벌였다. 센스 있는 이리에상이 이벤트 때 내놓을 요량으로 일회용 카메라에 찍어둔 사진도 나왔다. 이걸 날 주겠다고 해서 감동이었다...



이날은 토요일, 아쉽게도 감독은 월요일부터 출장이 있어서 일요일까지만 만날 수 있었다. 대신 일요일은 근처 신사에 마츠리가 있다고 해서 치쨩, 감독, 나 셋이서 같이 가기로 했다. 치쨩은 나에게 유카타까지 빌려준다고 해서 기대중이었다. 두 사람에게 주기로 한 수저 선물은 솔직히 바 주인 앞에서 내놓긴 그래서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다.


집 청소를 대충 하고 친구들이 오기 전에 근처 리틀냅카페에서 아이스 라떼를 사서 냉장고에 두었다. 이윽고 치쨩이 도착했다. 유카타에 게타까지 내 것을 사서 주었다. 거기다 속옷까지 지껄 빌려주고... 엄청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한참 옷을 입고 있는데 감독이 왔다. 선물 증정식 하고 신사까지 걸어가며 사진을 엄청 찍었다. 금붕어 마츠리라고 했는데 금붕어 낚시하는 곳이 없어서 좀 당황, 치쨩이 내 유카타를 반대로 입혀 놓아서 많이 당황했다. 셋이 라무네로 건배를 하고 10분 만에 신사를 나와 이벤트 중인 술집으로 향했다.



전날도 잠 덜 자고 밥도 못 먹고 술부터 들이키니 금세 지쳤다. 치쨩은 오비를 너무 졸라맸는지 힘들어 보였다. 조금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치쨩이 가끔 일하는 가게에 가서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물담배 좀 피우다가 30분 정도 자니 해가 져 있었다.


감독이 이번 여행 나랑 마지막이라고 밥을 사겠다고 해서 다시 바에서 만난 다음 유우키도 합세해 식당으로 향했다. 이 시점부터 내가 여행기의 제목을 ‘도쿄 별일’이라고 한 이유가 나온다. 모두가 더위와 피곤과 취기에 지쳤지만 도란도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상태가 제일 좋지 않았다. 립스틱을 바른 입술과 얼굴색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친구랑 또 당분간 못 본다는 생각에 힘을 냈다. 그쪽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감독이 사람을 점점 부르기 시작했다. 네 명이었던 인원이 여덟 명까지 늘어났다. 이럴 일인가 싶었지만 저 나름대로 열심인 것 같아서 내버려뒀다. 감독은 내일 아침 여섯시 출발이라고 해서 다섯시까지 마시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기도 했다. 열두시 반 정도가 되자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여서 가게를 나왔다. 2차를 가든 집으로 가든, 일단 걸으며 감독이랑 이야기를 하려고 옆으로 갔는데 자꾸 나를 피하는 거였다. 몇 번을 그러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 자리 자체가 나랑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자리인지 지 출장 송별회인지 알 수 없어진 마당이구만 누가 안 보내준다고 했는지 이런 짓거리를 하나 싶었다. 그래서 아 나 이제 도쿄 안 온다고 질렀다.


이때까지 이들에게 받았던 친절이란 것은 사실 남자친구에게 받는 곰인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여행 너무 행복했지만 불필요한 마음씀 때문에 기분이 묘해졌던 기억이 있다고도 적었다. 요구하지 않은 뭔가를 해주고 ‘얘한테 이 정도 했으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좀처럼 도쿄에서 누군가에게 뭘 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나의 속내에 그쪽이 관심을 갖기 까지는 우리의 사귐이 짧았고, 내가 일방적으로 마음을 빨리 연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시도한 관계 발전에의 노력을 중단할지 말지 고민의 순간까지 봉착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니 치쨩이 오히려 안절부절이었다. 치쨩을 먼저 보내고 감독과 선로 앞까지 왔는데도 떨어져서 걸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목례하고 돌아서는데 감독이 의외로 드라이하네 라고 해서 진심 욕이 나오려는 걸 참고 집에 돌아왔다. 안 놀아줘서 서운한게 아니라 나를 뭘로 알고 저 지랄 하나 싶은 마음이었다. 이 와중에 귀갓길 집 건물 다른 방 안이 아주 훤히 들여다 보이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집에서 빨개벗고 다녔는데 나는 이 근방 걷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누드를 보여 준 것인가... 아무튼 분한 마음을 안고 다음날 이사를 준비하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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