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효진 Oct 06. 2017

도쿄 별일

2017.5.25 ~ 2017.6.1 ④

몹시 드러운 기분 속에서 이사를 했다. 단골 바까지는 3분 거리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도 집이 1층이었다. 구글맵에도 아리까리하게 표기돼 있어서 간만에 한참 헤매다 도착했는데 집 문을 못 열겠어서 남들 나올 때 슬며시 들어갔다.


대충 짐을 풀고 보니 또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빈둥대다가 치쨩에게 유카타와 속옷 감사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메가돈키에 갔는데 카드가 비싸기만 오지게 비싸고 예쁜 것이 없었다. 겨우 골라서 또 미야마에 앉아 일단 하고 싶은 말을 잔뜩 적는데 눈물이 났다. 나르시시스트도 이런 나르시시스트가 없다. 자기 문장에 취해서 우는 인간이라니... 이걸 또 번역 작업을 하고 노트까지 사서 글씨 연습을 하는데 카페에 앉아서 엄청 훌쩍댔다. 한참 궁상을 떨고 있는데 치쨩이 만나자고 해서 저녁밥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미적미적대다가 엄청 늦어 버렸다. 거의 한 시간 정도?? 택시나 버스는 내가 어느 방향에서 타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무작정 걸어갔다. 무릎 꿇고 사죄한 다음 뭔가 알 수 없는 중화요리를 잔뜩 먹고 미안한 마음에 돈은 내가 냈다. 분명 그 다음에 술집을 갔는데 어딜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빨리 헤어졌다.



다음날 밀린 고슈인 순례를 나서기 전 늦은 식사를 하기 위해 늘 도쿄 여행 마지막날 들렀던 카페에서 항상 먹는 샌드위치와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이날 첫 목적지는 아타고 신사다. 출세와 연애의 신사라고 해서 지난 번에도 들렀지만 당시 고슈인의 존재를 몰랐던 터라 이번에는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높은 출세의 계단을 올라 고슈인을 받고 뒷문으로 내려와 이 근방 신사들을 조지기로 했다. 걷다 보니 도쿄타워가 나왔다. 고슈인맵에는 도쿄타워 안에도 신사가 있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막 더워지기 시작한 도쿄는 조금만 걸어도 땀이 무서울 정도로 흘렀다. 도쿄타워에서 마주친 한국인 여행객들은 몹시 시끄러워서 창피했다.



색깔 진한 옷을 입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며 신바시까지 걸었다. 이렇게 가는 족족 실패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슈인 타율은 낮았다. 한 열 군데는 돌았는데 수확은 고작 두 개였다. 땅값 비싼 동네라 그런지 고슈인도 300엔이 아닌 500엔이어서 놀랐던 부분이다. 신바시 역 앞 르누아르 카페에서 쉬다가 퇴근 시간 직전에 전차를 탔다.



오늘도 치쨩이 먼저 불러 주었다. 얘 나름대로도 엄청 신경쓰고 있는 듯했다. 집 근처 소바집에 갔는데, 별로라고 소문난 가게였는지 맛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감독 이야기를 꺼냈다. 미친놈이 그날 좀 차가웠던 것 같다고 했다기에 어이가 없어서 내가? 걔가? 라고 물었다. 확 마 이걸 그냥... 아무튼 반주하면서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날 피하냐고,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다시는 안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애가 적잖이 당황해서 설마 쓸데없는 이벤트를 준비한 건 아니겠지 했는데 역시나였다.


2차로 카츠상이 일하는 가게에 가자마자 치쨩이 너 화낼지도 모른다고 하는 거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감독이 왔다. 에효 시발... 그거 또 카나자와에서 택시 타고 왔다니까 화가 눈 녹듯 풀리는 나란 새끼... 치쨩은 내가 감독한테 엄청 화낼 줄 알았지만 뭐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밥도 안 먹었다기에 먹이고 얘기 좀 하다가 한 열한시 쯤 돼서 가야할 것 같다 해서 웃으면서 보내줬다.


치쨩과 3차로 간 바에서 토비상을 만나 한참 떠들다가 두 시 쯤 4차로 이동했다. 지금 이걸 쓰면서도 당시 기분이 떠올라서 잠깐 멈출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거기에 감독이 있었던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나 시벌거... 이거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니 왜 별 생각도 없는 사람을 첩질 현장 목격한 조강지처 포지션을 만들고 난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너랑은 영영 끝이다... 생각하며 치쨩 토비상이랑 수다 떠는데 미친 눈치 더럽게 보다가 네신가 그쯤에 일어서더라. 진심 피가 식어서 있는데 치쨩이 오늘은 좀 그렇네... 라고 해서 신경 안 쓴다고 답했다. 얘도 적잖이 실망한 듯했다. 나 역시 도쿄 자체가 여기까진가 싶었다. 5차로 나나메에서 딱 한 잔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쿄 별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