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
박찬욱 감독이 한국에서 만든 장편 영화는 2009년 ‘박쥐’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 ‘파란만장’, ‘청출어람’, ‘고진감래’, ‘A Rose Reborn’ 등의 단편 영화를 꾸준히 내놨고, 2013년에는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도 선보였지만 ‘한국형 복수극’의 클래식을 만들어 낸 그의 차기작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습니다.
그런 그가 여성 동성애 소설 ‘핑거스미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신작 ‘아가씨’로 돌아옵니다. 제작, 기획, 각본에 때로는 단역 배우로도 활약하는 정력적 영화인의 귀환을 반기듯 이미 ‘아가씨’는 세계 120개국에 선판매됐습니다. 5분이 채 될까말까한 스타일 예고편 만으로 말이죠.
그가 만든 작품만을 접하는 관객들에게 박찬욱은 굉장히 까칠하며 촬영장을 호령하는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토록 완벽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니 예민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섬세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적어도 지난 2일 열린 ‘아가씨’의 제작보고회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고요히 흔들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박 감독은 이날 “어려서 아주 내성적이었어요. 그래서 조용하고 지루한 인생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야단법석의 한복판에 있게 됐는지. 참 팔자가 희한하게 풀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라고 첫 인사를 건넸습니다. 최근 영화 ‘대배우 ’에서 이경영이 연기한 깐느박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감독인 만큼, 나긋나긋하고 느린 말씨가 우아하게 느껴졌습니다.
진짜 깐느박,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가 제69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게 된 것에 대해 “솔직히 경쟁 진출은 못 할 줄 알았어요”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예술 영화들이 많이 모이는 칸 영화제에 다소 어울리지 않을 만큼 모호한 구석이 없는 명쾌한 영화였기 때문에 놀랐다는 설명이었죠. 그래서 박 감독은 ‘아가씨’가 미드나잇 섹션에 적합한 영화라고도 생각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세계 영화계가 박찬욱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또 입증된 듯합니다. ‘아가씨’의 경쟁 부문 진출 덕에 김민희와 김태리는 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셈이기도 하군요.
이날 공개된 ‘아가씨’ 메이킹 영상에서는 박 감독의 장인 정신은 물론 언급했던 ‘부드러운 카리스마’까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모두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배우들에게 연기 디렉팅을 할 때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며 조근조근하게 핵심을 찌르는 의견을 내놓는 그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녀 숙희 역을 따 내기 위해 몰린 1500명의 배우 가운데 신예 김태리를 꼽은 이유도 궁금해졌습니다. 박 감독은 오디션을 보러 온 김태리에게 “나는 너로 정했다”고 했다는데요. 신인 배우에게는 평생 기억에 각인될 만한 명대사였을 듯합니다. 박 감독은 “김태리 양이 겁을 많이 내더라고요. 자기가 들어와서 망쳐 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들을 두려워 했는데, 용기를 주느라고 한 소리였어요”라고 밝혔습니다. 김태리는 “본격 촬영 전에도, 리딩 전에도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모르는 게 있으면 즉각적으로 여쭤봤어요. 그런 대화를 좋아하시고, 함께 아이디어 내는 걸 많이 좋아하셨어요”라고 증언했죠. 그 정도 연륜과 경력을 갖춘 감독이 신인을 대하는 자세는 가히 존경스러웠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소감도 매우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김민희의 공감능력, 조진웅의 다이나믹한 연기 진폭, 하정우의 촬영 현장 이해도를 하나하나 꼽아가며 칭찬했죠. 배우 입장에서는 이처럼 자신을 알아 주는 감독이라면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배우들 역시 침이 마르도록 박 감독을 추어 올리더군요.
박 감독의 부드러운 지휘 아래 최고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단결해 만든 ‘아가씨’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독은 “제가 만든 영화 중 제일 대사가 많고 주인공도 네 명인 데다가 러닝타임도 길다”며 특징을 꼽았습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아기자기한 영화고, 깨알 같은 잔재미가 가득해서 제 영화들 중 가장 이채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죠. 유혈이 낭자한 복수 이야기부터 엉뚱한 상상력이 녹아 있는 작품까지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 온 그가 이번에는 제대로 ‘말맛’을 살렸다는 ‘아가씨’는 오는 6월 관객을 찾아갑니다.
[사진] ‘아가씨’ 포스터,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