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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랭크 Mar 22. 2022

커피를 위스키처럼 즐기는 법, 펠른

F&B 펠른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할 때 “커피 한 잔 마시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커피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범용적인 음료로 자리잡았다. 현대경제연구원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평균 커피 소비량은 353잔으로 집계된다. 하루에 약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셈이다. 매일 한 잔씩 소비된다는 것은 커피가 하나의 식문화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커피의 역할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 내가 커피를 어떻게 마셨는지 떠올려보자. 게임 캐릭터가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포션을 섭취하듯 들이켰는가, 향과 맛을 오롯이 감각하며 즐겼는가? 일상 속에서 환기가 필요할 때,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 커피는 그 무엇보다도 접근하기 쉬운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익숙함 탓에 오히려 커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고 귀해진 요즘이다. 커피가 다시금 미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로 붐비는 경의선숲길을 지나 한적한 골목에 다다르면 노출콘크리트 건물 1층에 펠른의 작은 간판이 드러난다. 도로에 면한 출입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반 층 가량 내려가면 오픈 바 형태의 공간이 한 눈에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카페 하면 떠오르는, 여러 개의 테이블이 공간 군데 군데에 점처럼 흩어져있는 구성과 달리, 하나의 바가 길게 선처럼 공간 중앙을 가로지르는 구성이다. 펠른은 “커피에 대한 전문적인 대화가 가능한 곳으로, ‘마스터’라고 이르는 바리스타와 함께 커피의 재료, 맛, 향, 제조법, 마시는 방법에 대해 대화”할 수 있도록 이러한 바 형태를 취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자리마다 개별 조명과 콘센트를 설치하고, 좌석 바로 뒤에 개인용 옷걸이와 소지품을 두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사람들이 커피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공간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매만졌다.



펠른은 카페를 계획하기에 앞서 한국인들의 커피 문화를 관찰했다고 한다. 커피가 ‘식사 후 음료’가 된 이유를 빠르게 추출되는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하는 제조 방식과 테이크 아웃이 상용화된 소비 방식에서 찾았다. 그런 가운데 “커피는 왜 음식이 될 수 없을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커피를 하나의 음식으로써 다루며, 보다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커피를 제공해 폭 넓은 선택지를 제안하고자 했던 것이 펠른의 시작이다. 고객의 취향에 맞게 6종의 원두를 드립, 사이폰, 더치 방식으로 다양하게 추출하는 것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결과다. 또한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스페셜티 커피를 진정성 있게 고객에게 제공하고자 메뉴에 대한 소개도 매번 잊지 않는다. 바 형태로 되어 있어서 고객과 마스터의 거리가 가까워 소통은 쉽고 자연스럽다. 이렇듯 펠른이 커피를 대하는 태도는 보편적인 카페보다는 위스키 바, 오마카세 스시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커피와 디저트를 묶어서 코스 요리처럼 제공하는 본격적인 페어링 메뉴도 있다. 짝을 짓는다는 의미의 ‘페어링’을 커피에 적용시킨 것이 눈길을 끄는데, 일반적으로 페어링은 와인을 비롯한 주류에 사용되어 음식과 주류 사이의 좋은 궁합을 의미한다. 펠른은 고급 음식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페어링을 커피라는 음료의 영역으로 끌고 온다. 세 가지의 음료, 세 가지의 디쉬로 구성되는 페어링 코스는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된다. ‘커피벨트를 지나는 세계 여행’을 주제로 하는 코스는 세 개의 지역을 여행하듯 코스가 이어진다. 첫 번째로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된 과일향이 가득한 원두로 내린 드립커피, 지역 전통 식재료인 테프와 엔셋에서 영감을 받은 디저트가 나온다. 다음으로는 멕시코로 넘어가 화려한 색감의 스파클링 티 칵테일과 데킬라, 망고, 트로피컬 코코넛을 이용한 디저트를 함께 즐긴다. 마지막으로는 과테말라로 이동해 펠른의 시그니처 메뉴인 위스키 더치 커피와 마야 사원을 모티프로 한 옥수수 디쉬를 즐긴다. 코스의 주제는 1년에 3~4번 정도 바뀌고 그에 따라 세부 메뉴도 변화한다.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제철음식을 만나듯이 다음 시즌에는 어떤 주제와 메뉴를 맛볼 수 있을지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이곳만의 특징이다.



이렇듯 펠른에서 커피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데에는 공간과 가구도 큰 역할을 한다. 크지 않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인테리어 공사에만 6개월이 걸릴 정도로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 디자인을 맡은 원투차차차의 권의현은 한쪽 벽면을 따라 있는 옷걸이 겸 수납장부터 조리대와 집기류 그리고 가구까지 제작했다. 음료와 디쉬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기기들의 종류와 크기, 개수 심지어 이동 동선까지 미리 꼼꼼하게 확인해 모두 저마다의 자리를 잡아줬고, 그런 덕분에 자칫 깨끗하지 못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바 형태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단정한 인상이다. 나무, 금속 등의 재료를 날 것 그대로 사용해 공간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아연판을 절곡하여 제작한 바 의자는 금속의 차가움을 완화하기 위해 피부가 닿는 부분은 별도로 가죽으로 마감했다. 문 손잡이는 알루미늄을, 물에 닿는 수전 가리개는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적재 적소마다 다르게 적용된 재료의 차이도 즐거운 관찰의 대상이다.



펠른의 앞으로의 행보는 어떨까? 펠른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를 겪으며,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다양한 위협들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단절된 세계로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간의 감정, 소통, 협력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정성이 담긴 대화를 통해 배움과 이해, 나아가 연대를 만들고자 한다”는 목표를 이야기했다. 카페도, 맛집도 아닌 ‘커피를 매개로 하는 연대의 플랫폼’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커피 한 잔 마시자”라는 인사말이 “커피 페어링 하러 가자”로 대체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글. 최은화 에디터/ 사진. the blank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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