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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랭크 May 13. 2022

미라클 모닝 때문이 아니야,
이스트 씨네

복합문화공간 이스트씨네 이야기

   정동진 기차역에서 10분만 걸으면 도착하는 이스트 씨네는 저만치 멀리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다를 벗한 민박과 상점들 사이에서, 두가지 원색이 대비되는 건물 하나가 보인다. 방문을 계획한 누구라도 걷다보면 ‘확실히 저기가 맞는 것 같다' 싶어질 것이다. 이곳의 외관은 정동진의 일출을 상징하는 ‘마리골드'(노란색)와 바다를 연상시키는 ‘마리나'(파랑)를 입었다. 영화 제목을 철자 하나하나 갈아 끼울 수 있는 빈티지한 극장 전용 간판, 문 앞에 놓인 적색의 극장 전용 의자를 보고 있으면, 오늘 이곳에서 숨겨진 한 편의 명작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미라클 모닝의 정점에서 아침을 여는 ‘이스트 씨네’식 리추얼

   ‘이스트 씨네'가 어떤 곳인지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미라클 모닝'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본래 미라클 모닝은 인생에서 큰 사고를 겪은 후 기적적으로 두 번째 삶을 맞이한 인물 ‘할 엘로드’가 2014년경 주장한 생활양식이다. 한 인물의 아침 활용법이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다가, 국내에서는 2020년대에 접어들며 ‘갓생’을 추구하는 이들의 필수 옵션으로 자리 잡게 됐다. 최상급 표현 ‘갓(GOD)’에 ‘인생’을 조합한 이 단어의 본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첫 단추부터 잘 끼는 것이 중요하다. 갓생의 기본 매커니즘은, 성실한 아침이 성실한 하루 전체를 만드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트 씨네'가 시작 된 2020년 12월은, 미라클 모닝 열풍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불기 시작했던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이곳은 매일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의 일출시간에 맞춰 영업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곳이 아침잠이 많은 사람들더러 괴롭더라도 인내하면서 자신의 성향을 개조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영화로운 아침, 영화로운 바다"라는 모토에 맞게, 아름다운 일출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경험을 권하는 것이다. 이스트 씨네의 공식 SNS에는 매일 정동진의 ‘오늘 해 뜬 시간’과 함께 어스름한 아침의 기운을 맞고 있는 이스트 씨네의 외관 사진, 혹은 옥상에서 보이는 일출 사진이 번갈아 업로드 된다. 업로드와 함께 매일의 유동적인 영업 시간을 공지하는 기능도 있다. 이스트 씨네의 성실한 포스팅 덕에, 누구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곳을 바라보며 하루의 시작을 함께할 수 있다. 딱 그 정도의 화이팅으로 여는 아침도 괜찮다. 이는 어떤 리추얼보다도 정직한 리추얼이기도 하다. 


출처 | 이스트씨네 인스타그램


작지만, 분명히 영화를 위한 공간

   이렇게 일찍 문을 여는 이스트 씨네의 주요 정체성은 극장이 아닌 ‘영화 서점'이다. 묵직한 방음문을 열고 들어서면, 영화 분야의 도서/간행물로 채워진 서가, 주인 부부가 꾸준히 수집해 온 종이 영화 티켓을 콜라주한 액자, DVD, 카세트테이프들이 곳곳에 빼곡하게 보인다. 한편, 전면을 호방하게 차지 하는 건 서점 주인이 좋아하는 국내 여성감독 10인의 명패를 부착한 극장전용의자들, 그리고 책과 책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스크린이다. 어쩌면 서가 구역과 영화 상영을 위한 구역이 별도로 분리되어 있지 않는 공간 배치가 의의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책을 둘러보기 위해 영화 서점에 들른 고객들이 고유한 공간 배치 덕분에 ‘영화가 상영되고 있지 않은 극장 그 자체의 정취’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밝은 조명 아래서 스크린과 좌석을 바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단순히 극장 분위기를 재현해놓은 소품이 아니다. 이스트 씨네는 정기적인 상영 시간표를 마련해두는 대신 기획전의 형태로 영화를 상영한다. 그래서 원한다면 서점의 이른 영업시간이 종료 된 이후 이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심지어, 이곳은 이른 아침부터 빵을 굽지만 언제나 버터 팝콘도 판매하고 있다. 공간을 둘러싼 모든 것이 ‘이스트 씨네의 주인은 덕후다'라는 인상을 전한다. 그 대상이 영화인 것이다. 방문자들은 오래 전 한번쯤 꿈꿔왔던 바람, 작거나 좁더라도 나만의 취향이 깃든 아지트를 근미래에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갑자기 다시 해보게 된다.



강릉도 속초도 아닌 정동진에서 할 수 있는 일 ‘영화로운 스테이’

   서점에서 돌아 나와 올라선 2층에는 1인 전용 숙박 공간 ‘영화로운 스테이'가 있다. 이곳은 서점을 운영하는 부부가 실제로 거주하는 곳으로, 거실과 주방을 숙박객과 공유하는 구조다. 편안하게 머무르면서 식사와 이야기, 그리고 내일 아침의 뜨는 해를 함께 보는 시간을 공유하자는 세심한 의도가 담겨 있다. 주인 부부는 단 1명의 숙박객에게 양질의 쉼을 제공하는 걸 그날그날의 목표로 두는 것 같다. 여기에는, 바다가 가까운 동쪽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도 ‘정동진’이 단지 관광을 위한 선택지는 아니며 다른 방식으로의 머무름이 가능한 곳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숙박 시 체크아웃 시간이 다음날 오전이 아니라 ‘도착한 시간으로부터 24시간 이후'인 것도 이를 잘 보여주는 장치다. 



   올 해 8월 5일부터 8월 7일까지는 제 24회 ‘정동진독립영화제’가 개최된다. 정동진의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독립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매 해 영화제가 개최되는 정동초등학교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이스트씨네가 있다. 올 여름 다른 방식의 쉼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정동진 이스트 씨네의 ‘영화로운 스테이’에 머물러 볼 것을 권한다. 


- 글. 서해인 에디터 /공간 사진. the blank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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