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멘트 May 28. 2023

美에 대한 기준의 함정

패스트 패션에 대한 불편함

20대 초반 즈음 어떤 공공기관의 공식행사를 간 적이 있는데 별생각 없이 작은 이모가 젊었을 때 입다가 물려준 25년 정도 되어 색이 바랜 (그렇지만 멀쩡한) 폴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갔다가 나중에 해당 기관의 담당자로부터 한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같이 행사에 참여했던 동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요는, 앞으로는 옷을 조금 신경 써서 입고 와줬으면 좋겠다는 것.


나중에 그날 찍은 사진을 보니까 아니다 다를까 많은 사람들 사이에 내가 가장 후줄근해 보였고,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회인으로서 때와 장소에 따라 옷을 차려입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그때 처음으로 배웠던 것 같다.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을 보면 멋져 보이고 부럽기도 하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는 거의 매일 보는데도 같은 옷을 입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그녀를 보며 저 사람은 도대체 옷이 몇 벌이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옷을 잘 입거나 자신을 잘 꾸미는 사람이 매력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래서 우리는 옷장에 옷이 가득 차있어도 사고, 또 사는 거겠지. 나를 가꾸고 싶은 마음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헌 옷 처리장이 되어버린 Atacama 사막


내가 살고 있는 칠레의 북쪽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인 Atacama 사막이 있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이곳의 해 질 녘은 마치 나 홀로 화성에 있는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멋지다.

밤이 되면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지고, 아침이 되면 모래 위로 해가 반짝이는 신비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매년 대략 5만 톤의 헌 옷들이 버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 각국에서 버려진 옷들과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졌지만 결국 제 주인을 만나지 못해 소비되지 못한 옷들이 사막을 메웠다.


이미 갖고 있는 것들에 쉽게 싫증을 느끼는 우리 같은 소비자들을 위해 유니클로, H&M등 가성비가 좋아서 우리가 자주 찾는 글로벌 의류회사들은 Fast fashion이라는 비지니스 모델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가장 저렴한 원료와 노동력을 찾아 대량생산을 함으로써 옷의 가격을 낮추었고, 낮은 가격 덕분에 사람들은 더 쉽게 지갑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철 입은 티셔츠는 굳이 내년에 또 입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한 벌을 더 사면 새로운 옷 덕분에 기분전환도 되고, 입던 옷은 의류함에 던져버리면 내 옷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통해 다시 재활용될 거라고 생각하니 죄책감도 덜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버린 옷의 여정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매일 쌓여만 가는 저 헌 옷 쓰레기 산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저 신비로운 사막을 단순히 싫증이 나서 버려버린 옷으로 가득가득 채우고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는 평균적으로 매년 1천억 개의 의류가 생산되고 그중 33%에 해당하는 330억 개의 옷이 같은 해에 버려진단다. 그뿐만 아니라 흰 티셔츠 한 벌을 만드는데 소비되는 물은 2700리터에 달하고, 합성섬유 덩어리인 옷을 세탁할 때마다 또다시 우리는 미세플라스틱이 잔뜩 섞인 오염수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정말 아찔하다.

Valle de la Luna (아타까마 사막의 달의 계곡)

칠레는 한국처럼 저렴하고 질 좋은 옷의 종류가 많지 않아서 사실 반 강제적으로(?) 나는 여기에서 옷을 거의 사지 않게 되었다. 어떨 때는 1년 내내 옷을 한 벌도 사지 않은 해도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겨울이 오면서 뭔가 입을 옷이 없다는 느낌이 들어 오랜만에 옷을 사러 나갔다가 결국은 다시 빈손으로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겨울옷이 없는 게 아닌데 나는 왜 내가 무언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옷에 뭔가 매치할만한 겉옷이 없다는 생각, 내가 갖고 있는 저 치마를 입으려면 필요한 신발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 결국은 내가 갖고 있었던 멋의 '기준', 패션의 '기준' 때문이었다. 패셔너블 한 것과는 거리가 먼 나조차도 반바지에 긴 흰 양말을 신거나 청바지에 같은 색 청자켓을 입으면 이 사회에서 높은 가능성으로 패션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학습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옷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은 이 사회에서 내가 갖고 있는 옷들은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 같거나 혹은 조금 더 그 멋의 기준에 있어서 만족할 만한 아이템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옷을 때에 맞게, 단정하게, 그리고 나답게 입는 것은 좋지만, 어디에서 학습했는지 모를 수많은 미의 기준, 멋의 기준이 계속 생기는 한 나는 아마 내년 이맘때도 그 기준에 맞는 옷을 찾으러 쇼핑몰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멋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마음에 꼭 드는 옷을 입은 날에는 마치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고 자신감도 솟는다. 이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생각을 조금 유연하게 바꿔볼 필요는 있겠다. 언제까지나 저 아름다운 사막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고, 버린 옷으로 쌓아갈 수는 없으니까...


획일적인 멋의 기준을 벗어던지고 개성 있는 각자의 멋 혹은, 그것이 멋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입는 것이 옷을 잘 입는 것이다'라는 기준자체를 허물거나 더 넓게 확장해 가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면 어떨까?

옆집 아저씨가 30년 전 젊은 시절 입었던,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범상치 않은 패턴의 티셔츠에 펑퍼짐한 반바지를 입고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린 뒤 그 아래에 샌들을 신었더라도, 친구가 위아래 같은 츄리닝 세트에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고 해도 손가락질을 하며 빵 터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어쩌면 각 개인의 너무나 다양한 멋에 대한 기준이 글로벌 의류기업들로 하여금 획일적인 옷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패스트 패션이라는 비지니스 모델 자체가 더 이상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엄마 아빠의 옷장을 들여다 보고 혹시 집안에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옷을 멋스럽게 빈티지 스타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진짜 나만의 스타일을 발견하게 되는 날도 생길지 모르겠다. 친구끼리 서로 싫증난 옷을 바꿔 입어보거나, 나이차이가 크지 않다면 형제와 옷을 잠깐 바꿔 입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한국만 미세먼지가 심각한 것은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대자연이 있는 남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스모그가 자욱한데, 연구에 따르면 1년에 전 세계 항공기나 선박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보다 패션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더 많고, 전 세계 온실가스의 10%가 패션산업에서 나온다고 하니.. 이제는 이 뿌연 하늘을 보면서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자동차 매연뿐만 아니라 내가 어제 아무 생각 없이 버린 옷들을 생각해야 하는 때가 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가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