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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Jul 21. 2020

안경

6월의 단어 『안경』, 공교롭게도님의 글





대선 이후 한참이었으니 2018년 여름이나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횡단보도에 서있는데 교복입은 학생의 가방에 붙은 노란리본이 문득 눈에 들어와 물끄러미 본 적이 있었다. 투표권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이 속속 등장하던 때였으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노란리본에서 비장함이나 서늘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본디 '노란리본'(단순한 '노란 리본'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붙여쓴다.)은 누군가에게는 모진 십자가일 것이고, 그들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는 소박하지만 굳은 연대의 표시였다.



한 시대의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던 노란리본은 그 시대가 퇴장하자 그 의미가 많이 퇴색한 듯하다. 이제는 노란리본에 지나친 의미부여없이 자연스레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고리로든 스티커로든 손이 많이 닿는 물건 이곳저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 때는 1년, 지금은 3년을 꽉 채운 시간의 변화를 체감했다고나 할까.



이제는 노란리본이 하나의 패션이나 악세사리가 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훨씬 가볍고 성기고 말랑한, 말그대로 '리본'이 되었다. 단지 노란 끈을 한번 꼬아 붙였을 뿐인 리본이 이제껏 짊어진 거창하고 무거운 의미를 내려놓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이 내심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안경을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썼다. 어린 아이가 뭘 보는데 계속 찡그리길래 안경점에 데려갔다고 한다. 그 날부터 나는 안경을 쓰게 되었다. 아마 성장이 멈춘 때까지 시력이 계속 떨어진다고 했는데, 이미 중학생 때부터 충분히 고도근시였다. 안경을 써도 교정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안경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눈뜬 장님도 마냥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안경이 썩 잘 어울리는 편도 아니었고 워낙 도수가 높았기 때문에 생김새에 직접적인 기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안경을 쓰는 이유는 순전히 기능적이었다. 멋을 내기 위함도 아니고 불편을 무릅써가면서 반드시 써야 하는 일상의 필수품이었다. 대학교에 오자마자 매일같이 렌즈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안경을 싫어했다. 




그러다가 라섹 후 맞이한 해방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제는 세수할 때 시야를 잃는 불편도 없고, 축구할 때 공에 안경을 맞아 다치는 일도 없고, 무심코 안경을 쓴 채 자다가 코와 귀가 아파서 깨는 일도 없었다. 매일 렌즈를 넣었다가 빼는 번거로움도, 건조함과 이물감도 이제는 안녕이었다. 수술 직후 며칠의 고통쯤은 단번에 잊을 정도의 해방감이었다. 그렇게 내 삶에 안경은 다시 없을 줄 알았다.



최근 안경을 다시 샀다. 특별한 계기를 굳이 꼽자면 부쩍 눈이 항상 피곤해졌다는 것? 컴퓨터나 폰을 자주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블루라이트를 차단하는 안경을 사면 좋다고 해서 사봤다. 도수는 따로 넣지 않았다. 굳이 안경을 쓰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니 장시간 작업을 할 때에만 따로 쓸 것이다. 그런데 아직 안왔다. 그러니까 현재는 안경을 기다리는 중인 것이다. 



지금 나에게 안경의 쓸모란 뭘까. 시력교정'용' 안경 또는 블루라이트 차단'용' 안경이라면 굳이 앞서 노란리본 주절주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안경에는 그렇게 심각한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는 않다.) 불편을 무릅쓰고 굳이 다시 쓰는 이유? 기실 안경이란 매우 불편한 도구이다. 이미 20년 넘게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경을 다시 찾은 이유를 고학력자가 되어가는 노정에 필요한 지적인 이미지를 더함이라고 설명하면 어폐가 있으려나. 일상을 반영한 멋을 위한 몸부림? 멋의 첨단이란 뭐랄까, 극단의 비실용이라고 해야 하나. 쓸모없음도 부족하고 차라리 불편함이 멋의 본질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불편함을 자처한답시고 안경을 다시 찾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최근 들어 머리를 많이 길렀다. 아마 태어나서 가진 가장 긴 머리카락인 것 같은데, 어쩌다보니 기른 머리지만, 이왕 이렇게 된김에 한번 묶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그러한 스타일을 찾아보니 십중팔구 두 가지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얇은 금테안경과 풍성한 수염이었다. (수염은 앞으로도 안될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안경이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안경을 쓴 내 얼굴이 마음에 안들었는데, 다시 쓰는 안경이 어떨지 모르겠다. 얇은 금테인데 써보고 안 어울리면 환불하면 되겠지, 환불조항이 있으니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건을 상상해보면 뭔가 회중시계를 꺼내서 보는 19세기 고생물학자같은 모습을 기대하는듯 하지만 실상은 이양선이 흘리고 간 정체모를 뭔가를 코에 얹은 봉두난발 화전민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기능을 포기하고 오로지 멋, 멋, 멋을 기대하면서 쓰는 안경인데,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후일 이즈음의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 무엇이라고 기록할 것인가. "그 날 안경을 구비함으로써 우아한 교양인이 되는 위대한 첫걸음을 뗀 것이었다."인가 아니면 "우아한 교양인 되기는 애초 장발에서부터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으며, 안경의 구비로 그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일 것인가.



결말은 아직이다.   




Written By. 공교롭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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