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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Jul 21. 2020

혐오

5월의 단어 『혐오』, 공교롭게도님의 글




나는 '혐오'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미가 혼탁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 단어를 이야기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이해할지 확신이 없고, 상대가 이 단어를 이야기했을 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뜻을 숙지하지 못한 단어를 용례를 더듬어가면서 대충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혐오'의 뜻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할 능력이 되지 못하고, [혀모]라는 동일한 소리값을 가진 단어와 용어 사이 괴리를 짚고 싶다.



'-혐오'는 이제 어디에나 다 붙을 수 있는 접미사 비슷한 것이 돼버렸지만, 본디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리고 '여성혐오'는 우에노 치즈코의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2012)(女ぎらい―ニッポンのミソジニー(2010))'를 통해 페미니즘 연구자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눈에 띄는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번역을 거치면서 '여자를 싫어함 -일본의 미소지니-' 정도 되는 제목이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로 온도가 확 올라간 점, 둘째, '여성혐오'란 본디 'misogyny'라는 번역어 'ミソジニ'의 재번역어라는 점이다. 본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성혐오'가 일본어로 어떻게 쓰였는지, 예컨대 '女ぎらい'인지, 'ミソジニ'인지, '女性嫌悪'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제목만 봤을 때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원어 'misogyny'의 뜻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예리하게 언급할 수 있다면 이를 한국의 '여성혐오'와 비교할 수 있겠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러할 수 없다. 단지, 원어 'misogyny'와 번역어 'ミソジニ' 그리고 재번역어로서의 '여성혐오'가 어떠한 핵심을 공유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한국의 '여성혐오'와 비교하여 'misogyny'와 'ミソジニ'의 실제 용례가 각각 어떠한지는 이 글에서 중요하지 않다. 우에노의 책에서 드러나듯 'ミソジニ'는 일본 특유의 사회상을 반영하며 'misogyny'와 뚜렷하게 다른 역사적 궤적을 나타낸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여성혐오'또한 'misogyny'와 'ミソジニ'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는 한국적 현상이다. 따라서 이 셋 사이의 일치 여부를 논하는 작업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에서 '혐오'라는 용어 내지 단어가 갖는 혼탁함과 이러한 난맥을 초래한 배경이다.



하나의 용어가 들어와 접변하는 과정에서 그 용어의 뜻은 일정하게 뒤틀리게 된다. 적확한 번역어가 이미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더욱 그러하다. 번역어 대신 대역어를 고민하게 되는데, 이를 용어와 단어가 경합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불일치는 필연적이다.



이를 왜곡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차라리 자연스러운 연착륙의 방증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혐오' 또한 그러한 것으로 봐야할 것인데, 이 연착륙은 과연 성공적인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실패다. 단언컨대 한국의 '여성혐오' 발화자, 특히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한해서 분명히 게으르다. 




연구자가 쓰는 용어는 특정 맥락을 전제로 하고 그 안에서만 통용되는 함의가 있다. 그런데 전문적이고 맥락의존적인 용어가 대중이 쓰는 단어와 접변하여 일상의 대화에 스며들 때에는 뜻밖의 부작용이 발생한다. 대중들의 입말을 타면서 단어들 속에서 용어가 갖는 민감한 예리함이 닳아버리는 것이다. 나아가 단어가 갖는 평면적인 사전적 의미, 발음상의 유사성 등으로 맥락이 전도되고 유희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예컨대, '일밍아웃'같은 단어는 '커밍아웃'이라는 용어가 갖는 긴장, 용기와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이며, 평소 성적소수자를 향한  일베의 폭력성을 감안하면 성적소수자는 자신들만의 용어를 빼앗긴 것이며 '일밍아웃'은 터무니없이 모욕적인 단어이다. 따라서 용어의 창안이나 번역은 단어화로 인한 오염을 방지할 수 있을 수준의 높은 완성도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라는 용어와 일상에서의 단어 '소외' 사이 의미 상 경계는 비교적 명확하여 마르크스가 의도한 의미로 일상 대화를 진행해도 애매하지 않다.



반면에 '혐오'의 경우는 하필 단어의 특성상 이러한 오염이 더욱 심각할 여지가 특히 다분하다. '혐오'의 사전적 의미는 "싫어하고 미워함"인데 실제로 체감하는 수위가 대단히 높기 때문에 본디 일상에서는 잘 쓰지 않는 단어였다. 특히 사용 빈도가 낮은 한자로 조합된 단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혐오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맛을 가졌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단어였다.



그런데 단어 선별에 무감한 대중들은 자신의 의미를 전달할만한 여러 단어들 중 이렇게 강렬한 단어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용어 '혐오'의 노출 빈도가 점차 높아지자 '혐오'가 가진 용어로서의 엄밀함이 무뎌지고 일상의 간편한 단어가 돼버렸다. 싫다라는 의사표현은 미묘한 어감 차이를 갖는 여럿이 있겠지만, 이제는 '극혐'이라는 깃털만도 못한 가벼운 표현으로 수렴한다. 이처럼 이러한 세태에서 가장 큰 문제는 단어 '혐오'가 갖는 강렬한 어감 때문에 용어 '혐오'가 갖는 의미가 잠식된다는 사실이다.




'misogyny'의 번역어로서의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비하나 차별, 대상화 또는 객체화 등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표현이었다. 그런데 단어 '혐오'의 사전적 의미가 드리우자 용어로서의 '혐오'는 강렬한 공격성과 거부감까지 덧씌워져 구체적인 폭력까지 내포하는 용어로 오염되었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 남녀간 성별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핫한 단어, '여성스럽다'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misogyny'의 번역어로서의 '여성혐오'를 일삼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여성성을 거부하고 여성을 향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대중들의 일상 대화에서 '여성혐오자'라는 낙인은 두 의미 중 후자로 기울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여성혐오'를 언급하는 사람은 모두 후자의 의미만을 의도하는가. 여성문제를 선도하는 연구자들은 용어로서 '여성혐오', 즉 'misogyny'의 번역어로서 [여성혀모]라고 말하기 때문에 '여성혐오'를 둘러싼 전장은 언제나 혼란스럽다. 그나마도 개인의 성향이 급진적인지 온건한지에 따라서 의미의 강렬함이 엇갈린다. 



그러니 요즘의 [여성혀모]라는 음성이 오가는 맥락은 용어와 단어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자칭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misogyny'가 '여성혐오'라는 용어로 번역되었을 때 '혐오'라는 기존의 단어와의 마찰을 예측하지도 못했고, 심각한 마찰이 현실화되었음에도 적극적인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평소 일상 언어에 내재된 구조적 편향에 민감한 그들이 'misogyny'를 둘러싼 복합적인 지형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혐오'라는 블랙홀을 왜 방치하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한국에서 '여성혐오'라는 용어가 독립된 하나의 용어인지, '여성'과 '혐오'의 합성어인지도 합의가 되어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여성혐오'로 쓰는 사람도 있고 '여성 혐오'로 쓰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단순히 띄어쓰기의 차이가 아니라 그렇게 띄어 씀으로써 다른 맥락에 놓인다고 생각하지만,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공유되지 않아 보인다.



 '여성'이라는 특정 정체성을 여타의 정체성과 달리 구별해서 특수한 위치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아직도 무르익지 못했을까. 더불어 '혐오'라는 용어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확고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혐오'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의미라면 여러 정체성에 두루 수식되며 일정한 현상을 가리킬 수 있겠는데, 유독 '여성' 뒤에서만 강력하게 의미가 부각된다.




'혐오'의 일반적인 정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지적하자면 다시 번역의 문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 서점에서 혐오를 검색해보니 원어 'misogyny'가 포함된 번역서가 다수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저명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에서의 '혐오'는 'disgust'의 번역어이다. 분명히 서로 다른 'misogyny'와 'disgust'가 '혐오'라는 동일한 번역어로 나란히 놓이기에는 조금 어색해보인다. 차라리 'disgust'가 사전적 의미로서 단어 '혐오'와 맞닿아보인다. 약자를 향한 파괴에까지 이르게 하는 부당한 감정과 이로 인한 구체적인 폭력까지 시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여성혐오'의 의미로는 구체적인 폭력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disgust'와 일정 부분 겹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기원과 맥락상 'misogyny'와 'disgust'는 엄연히 구별해서 번역되어 사용되어야 한다. 나아가 비단 'disgust'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혐오'가 발화되는 맥락을 보면 'hate'나 'phobia'로 표현될만한 증오가 느껴지기도 한다. 타자를 바라보는 대상화의 스펙트럼을 뭉뚱그려 '혐오'로 통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misogyny'와 'disgust', 'hate', 'phobia' 등의 자리도 반드시 정교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핵심적인 용어가 한국어로 번역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흥미로우며 매우 중요하다. 그것만을 다루는 역사학의 분야가 있을 정도다. 요즘 들어서는 원어와 번역어 사이 간극 때문에 부자연스러움을 무릅쓰고 원어 발음을 그대로 살려쓰는 경향도 보인다.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즘'으로 '탈근대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쓰는 등 본래의 용어가 가진 풍부한 함의를 지키기 위해 다시 원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그 함의를 잘 살린 경우도 있다. 최재천은 에드워드 윌슨의 책 'Consilience'를 한국에 소개할 때 핵심어 'consilience'를 어떻게 번역할지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냥 '컨실리언스'로 표기할까도 했는데, 결국에는 한문학자의 도움까지 얻어가며 '통섭'이라고 번역을 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이 기존에 있던 '통섭(通涉)'이 아니라 '통섭(統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윌슨이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책을 서술한 만큼 그에 맞게 '거느릴 통(統)'과 '잡을 섭(攝)'을 조합해서 번역한 것이다. 번역자의 이런 세심한 고민 때문에 '통섭'은 '통일', '통합', '융합', '합일' 등 대역어 후보군에 비해 확고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원어가 어떠한 맥락에서 기능하는지 포착하고 그러한 맥락을 한국적으로 정교하게 재구성해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원어와 번역어를 매개하는 특성에는 창안자의 의도도 있겠지만, 형태나 소리의 유사성도 있겠다. 흔히 초월번역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띵작'을 'rnasterpiece'로 번역한다거나,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v'와 'ㅂ'의 공통점인 [b]발음을 활용해 의역한 것도 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주제어가 '혐오'지만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번역에 대해서 늘어놓는 이유는 '혐오'라는 용어 사용의 난맥이 아쉽기 때문이 가장 크기도 하지만, 나 또한 그러한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험'이라는 용어를 고민 중인데, 현재 한국에서는 'risk', 'hazard', 'danger', 'peril' 등의 번역어로 두루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위험'이라는 번역어 안에는 저들 원어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risk'의 번역어로서 '위험'에 관심이 있지만, 영어가 서투른 입장에서 그것만 뚝 떼어내서 '위험'이 아닌 새로운 번역어를 제시하기 여간 쉽지 않다. 현재로서는 따옴표 처리를 하거나 각주로 부연하긴 하는데 언젠가 최재천이 가졌던 혜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Written By. 공교롭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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