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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Aug 23. 2020

사람다운 ‘비광’의 길

함께쓰는 한 단어 『비』, 공교롭게도님의 글




사람다운 ‘비광’의 길

비가 너무 흔한 것인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인지, 매일같이 주룩주룩 내려대는데도, 쓸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비의 팬도 아니어서 노래든 드라마든 잘 아는 것이 없으니, 매일같이 티비에 나오는데도, 역시 쓸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비'에 관해서 나의 감상이 참 앙상하구나라는 생각으로 날짜만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수준이 비슷한 사람 여럿과 만나 밤새 놀았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를 새삼 만났다.          




여기서 다루는 '비'란 고스톱에서 12월에 해당하는 바로 그 비다. 비는 비광과 비고도리(열끗), 비초단(띠), 비쌍피로 구성된다. 그리고 똥팔삼의 정반대편 비풍초의 가장 앞글자를 맡고 있다. 비풍초의 선봉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 비는 열량이 물에 가까울 정도로 영양가없는 패다.



 비를 확보함으로써 상대방의 삼광, 고도리, 초단을 견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삼광, 고도리, 초단이 확보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니 비쌍피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빠른 승리와 직결된다고 보기 어렵다.



말하자면, 내가 '부득이하게' 비를 '굳이' 가져간다는 것은 그로써 직접 점수를 얻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상대가 비쌍피를 따갈 바닥패를 없애기 위함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가 비쌍피를 들고 있지 않은 이상 비는 언제나 큰 고민없이 내던질 수 있는 패다. 요컨대, 비는 고스톱에서 찬밥 신세 중에 찬밥 신세이다.          



비의 우두머리, 비광의 비애를 읊은 절창이 이미 있었다. 영화 스카우트를 보면 극중 서곤태(박철민 분)의 시 '비광'이 등장한다.                



비광          


나는 비광

섯다에는 끼지도 못하고,

고스톱에선 광대접 못받는 미운오리새끼     


나는 비광

광임에도 존재감 없는 비운의 광

차라리 내 막내 비쌍피가 더 인기 많아라     


하지만 그대,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오

그대가 광박 위기를 맞을 때 지켜주는 것은 나 비광이요,     



그대의 오광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것도 나 비광이라는 것을,

나는 비광

없어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슬픈 광!


영광의 주인공보다는 비애의 주인공에게 눈길이 한번이라도 더 가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던 비광,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류의 것들 사이에서 천대받기 일쑤다. 광이라는 명목이 무색한, 즉 명실상부하지 못한 광이다. 명목과 실질 사이 이러한 간극이 현격하기 때문에 서곤태의 시가 더욱 절절한 것 아닐까.           



이렇게 일부러 비를 두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니 문득 비광에 감정이 이입된다. 최근 신변에 변화가 생겼다. 가을학기부터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졸업조차도 쉽지도 않겠지만, 그나마 졸업을 하면 얻게 될 자격인 문학'박사'가 꼭 비광같다고나 할까. 문학박사만큼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게 또 있을까.



  의학박사, 공학박사, 경영학박사가 똥팔삼이라면, 문학박사는 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결격이 너무도 뚜렷한 비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학박사라는 작자들은 어수룩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촌각을 다투며 맹렬하게 질주하는 이들 옆에서 속편하게 딴소리나 늘어놓는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어차피 으스대며 함께 뛰지도 않을 거면서 별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로 이러쿵저러쿵 고리타분한 훈수나 대고 있으니 정작 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만 김이 새버린다. 어딜 가나 영 환영받지 못할 사람들이다. 초록모포 위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가만있으면 3점으로 해결될 일을 괜시리 껴들어 초를 치는 바람에 2점에 그치게 하니까 비광같다는 것이다.     



세태가 이러하니 앞일은 아무래도 모르는 것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타 전공의 박사들마냥 앞날이 창창하지는 않다. 가능성에 방점이 찍힌 호명인 '학생'을 정리하고 이제는 이전보다 생활력을 엄격하게 요구받는 호명인 '직업인'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초입인데,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스스로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끄적거려보면 때때로 그 초라함에 이런저런 것들이 모두 우스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광'의 길을 택한 것을 아직까지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서 이런저런 표현들을 고안중이다. 이 글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48장의 화투 중에 유일하게 사람이 들어있는 패가 비광이다. 자연물과 동식물로 구성된 온갖 패들 중에서도 비광이 유독 내게 각별한 이유이다. 비광에 그려진 사람의 의미를 '굳이' 부각시킨다면 3점을 2점에 그치게 함으로써 승부의 판가름이 미뤄지는 것을 방해가 아니라 성찰이라고 바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멀리 보아 비광을 5광이라는 지점에 이르는 노정의 필수요소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긴 여정에서 지름길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쯤은 망설이고 의심하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뭇사람들의 눈총을 굳이 사는 문학박사들을 다시 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시대착오적인 헛소리가 아니라 시대를 불문하고 잃어서는 안되는 무언가에 대한 상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비광'들을 가리켜 융통성이 없다고 비웃을 것이다. '비광'들의 균형잡힌 시선을 걸림돌로 여겨 뿌리뽑아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비광의 자리를 없애버리고 4광만으로 얻을 수 있는 점수는 4점이다.




그에 비해 비광까지 포함하여 5개의 광이 모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점수가 5점이 아니라 15점(광박은 논외)으로 껑충 뛴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다. 바로 이 10점의 비약이 생기는 연유를 사람다운 '비광'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납득시킬지, 이제 막 '비광'으로서의 삶에 첫발을 내딛는 즈음에 문득 고민이 된다.




Written By. 공교롭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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