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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Aug 23. 2020

폭우

함께쓰는 한 단어 『비』, Joy 님의 글


폭우


 냄새 중의 냄새는 양파 볶는 냄새 아닐까. 냄새의 왕. 양파 볶는 냄새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담고 있다. 어둠과 그늘, 절벽의 햇살, 꽃잎이 짓이기며 빨아대는 습기, 간절한 한 사람의 안부, 그 모든 것을 담았다.


 허기에 지쳐 집에 돌아오면 뭘 먹을 것인지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양파를 볶던 때가 있었다. 양파를 볶다가 물을 붓고 스파게티 면을 끓이기도 했다. 양파를 볶다가 부자가 되어야겠단 생각도 했고 양파를 볶다가 불을 끄고 시를 읽은 적도 있다. 사랑을 잃고 양파를 볶다가 그렇게 짐을 싼 적이 있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1.

 비가 오는 날에는 후각이 예민해진다. 비만 오면 그 전에 몰랐었던 온갖 냄새가 코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비가 오는 날 맡으면 가장 좋은 냄새는 역시나 흙냄새, 숲속에서 맡는 나무 냄새다. 비 오는 제주도, 비자림에서 우산을 쓰고 걸으면서 맡았던 숲의 향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도 선명하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비 오는 날에 더욱 익숙하게 맡을 수 있는 것은 책에서 시인이 말한 양파 냄새와 커피 냄새 정도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에는, 꼭 책을 펼쳐 저 부분을 읽어보고는 했다. 그러면 내가 요리하지 않아도, 정말 양파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2.


너는 내가 좋다고 했다.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네가 말하지 않아서 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고 어떤 마음도 가지지 않았다.


너의 말을 듣고 나니, 예전의 내가 생각난다. 내가 너 나이 때 그랬었는데. 맹목적으로 비이성적으로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나 스스로 어쩔 줄 모르고.



가끔 스트레스를 아주 많이 받으면, 한 사람이 꿈에 나온다.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는 사람. 연인이었지만 인연이 아니어서 어긋난 그 사람이 꿈에 나온다. 그 사람은 내가 가진 환상만큼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이미 끝난 관계라는 것도 다 알지만, 그래도 가끔 꿈에 나오는 걸 보면, 그가 무의식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흐른 이제는 안다. 내 마음이 맺지 못한 이별이라서 그렇다는 걸.


그 사람 말고도 몇 번의 연애를 더 했고 그들을 많이 사랑했지만, 결국 ‘아, 이 사람은 나랑은 인연이 아니구나’라는 걸 알아서 헤어졌다. 감정적으로든, 상황적으로든 정말 끝내야겠구나, 생각해서 이별했다. 그래서 아프기는 했어도 맺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처음으로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이어서. 상대방은 끝났는데 나는 아직 끝나지가 않아서, 내 스스로 납득이 가도록 마무리가 되지 않은 인연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도 안다. 그래서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무의식이, 미련이 이렇게도 무섭다.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꿈.      



 내가 좋다고,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네 얘기를 들으면 그 해에 그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생각난다.

 

나는 어른스러운 척, 나는 너의 무엇이 아니고, 설령 너의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받을 수 있는 너의 감정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부모자식 관계, 친구 관계, 직장 동료 관계가 그렇듯이 남녀관계도 다 인간관계다. 상대방이 그 마음을 주고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속도가 맞는지를 살펴보고 감정을 줘야 한다고. 그게 지나치면 부담스럽다고.



 그래, 나는 너의 마음이 너무 무거워. 많이 부담스러워. 숨막혀. 너는 조급해진다고 했고, 그래서 내가 부담을 느끼길 바란다 했고, 니가 보기엔 내가 너무 태연하다고 말했지만, 보통 사람이 부담감을 느끼면 도망가게 되어있단다. 그게 구속이 되거든. 그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숨 쉴 수가 없어. 그러면 도망가고 싶어지지.

 



네가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더라도, 갑자기 긴 시간 동안 쌓은 마음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어, 그 마음이 너무 폭우 같아서. 비가 많이 오는 날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다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말은 이렇게 해도, 정작 나도 그때는 그러지 못했지.



나는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걸 그 사람이 몰랐을까.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컸고, 너무나 함께하고 싶어 했고, 너무 많이 바라봤었다. 그건 티를 내고 안 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그 마음이 그냥 보이는 것 같아. 너무 선명하게 잘 보여. 좋아하는 마음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니까.




문득 그래서 생각했다. 그 사람도 내가 숨막혔을까.


만약 그런거라면, 그것도 참 슬프다, 싶어서.



 나는 그때 너무 잘하고 싶었는데. 지금의 네가 나에게 그런 것처럼,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숨막히는 존재가 된 게, 상대방을 폭삭 젖어서 춥게 만드는 폭우같은 사람이 된 게, 너무 서글퍼서 그때의 내가 불쌍해서.



조금 덜 좋아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게 잘 안 됐다. 덜 좋아하는 게 안 됐다. 그런 사랑도 있는 모양이다.



덜 좋아하려고 해도 그게 안 되는 사랑.      




Written By.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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