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한 단어 『비』, maj님의 글
올해 장마는 이상하다. 연신 보도되는 장마 예보를 듣고 튼튼한 우산과 신발까지 새로 장만했건만, 이러한 철저한 준비를 약올리기라도 하듯이 비는 금방 그치곤 했다.
나는 원래 비 오는 날을 무척 싫어했다. 분위기 있고 낭만적이라며 비 올 때마다 소녀처럼 좋아하는 엄마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엄마가 예외에 해당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선호하지 않아서 비를 싫어하는 게 남다를 것 없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정말 유독 싫어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반바지를 입으면 맨다리에 튀는 아스팔트 길의 구정물, 긴바지를 입으면 다리에 척척 달라붙는 꿉꿉한 촉감, 아침에 산뜻하게 머리를 감고 보송하게 말리고 나와도 이내 고개를 내미는 성가신 잔머리칼, 이 모든 게 싫었다. 눅눅하고 꿉꿉하고 끈적거리는 촉감을 유달리 싫어했던 나는 어린이의 요령 부족으로 인한 손가락 사이로 녹아 내리는 아이스크림 국물이 싫어서 소풍 날 반장 엄마가 돌린 아이스크림 바도 혼자 거부할 정도로 예민했다.
비 오는 날엔 유치원 등원도 거부하는 날 구슬리려고 부모님은 고운 무지개빛 장화를 신겨주셨다. 하지만 장화 사이로 튀는 몇 방울의 비도 내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짜증을 내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내가 얼마나 비 오는 날을 싫어했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된 후에는 비로 인한 불쾌한 촉감보다도 회색 빛 하늘이 주는 우울한 기분이 비 오는 날을 더 싫어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내 몸 구석구석을 건강히 채워줄 것만 같은 반짝반짝한 햇빛과 바삭한 공기, 새하얀 구름이 포슬포슬하게 낀 파란 하늘을 좋아하는 내게 그 모든 걸 앗아가는 회색빛 하늘은 날 무력감에 빠뜨리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비 오는 날은 예정된 친구들과의 모임, 야외 데이트, 가족 여행을 취소시키는 원흉이었다. 빨간 펜으로 예쁘게 동그라미 쳐진 다이어리 속 숫자 위에 가위표를 긋게 하는 주범이었다. 집순이 기질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내게 장마 기간은 가택연금과도 같았다.
유독 그 사람과 여행만 가면 비가 왔다. 비가 와도 그렇게나 퍼부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구멍 났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비가 왔다. 두 번의 제주도, 그리고 도쿄에서도 일기 예보와 달리 갑자기 엄청난 폭우가 왔다. 심지어 도쿄에서는 갑자기 태풍이 도쿄로 경로를 틀어서 걱정 어린 외교부의 재난 문자를 꼬박꼬박 받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 여행들은 재미있었다. 폭우로 인해 모든 일정이 취소되어 전망 좋다는 카페라도 가려는데 가던 도중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퍼붓는 비 때문에 산 중턱 갓길에 차를 세웠을 때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깔깔 웃었다. 결국 몇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노래 듣고 배고파서 차에 있던 모든 과자를 다 먹어 치운 후에야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 성산일출봉을 보다가 열이 펄펄 끓어서 한여름에 이불로 꽁꽁 싸맨 채 호텔방에서 티비만 봐서 재미있었다.
비가 절정으로 퍼붓기 시작하던 날 꾸역꾸역 쇼핑을 하겠다고 쇼핑백을 양손에 주렁주렁 들고 오모테산도를 휘젓고 다니다가 거지꼴이 된 모습이 재미있었다. 도쿄 전역에 태풍 경보가 내려 거의 모든 곳이 문을 닫아서 정말 할 게 없던 그 날, 묵었던 호텔 인근 마트에 DSLR을 챙겨 가서 채소를 들고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 수십 장을 찍어서 긴자가 재미있었다. 비 오는 날은 비가 오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에는 슬펐다. 가장 소중한 추억이 무기가 되어 공격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게 많아질수록 그것들이 널 아프게 할 거란 어느 인스타그램에서 본 구절을 곱씹게 되었다. 비 오는 날이면 도쿄가 가고 싶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내일은 서울에 비가 온다고 한다. 이번에는 기상청이 맞을지 반신반의하며 젤리슈즈를 꺼내 본다. 실내에서는 추울 수도 있으니 긴바지지만 습기 차도 달라 붙지 않고 금방 마를 통 넓은 린넨 바지도 꺼낸다. 비 오는 날이 더 이상 싫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일 아침에는 좋아하는 커피집에서 고소한 카페라떼는 사야겠다. 우산 들다가 혹여나 흐르지 않도록 마개를 잘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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