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라는 호칭이 적절한지는 논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니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려고 한다.
난 모든 사모님이 행복하길 바란다. 진심이다. 아무리 남편이 목사일지라도, 사모의 행복이 우선이니 그 어떤 것과도 행복을 바꾸지 않았으면 한다. 긴 머리가 좋다면 길게 하고, 짧은 머리가 좋다면 짧게 하면 된다. 바지가 좋다면 바지를, 치마가 좋다면 치마를 입으면 된다. 머리가 길어도 뭐라 하는 성도가 있고 짧아도 뭐라 하는 성도가 있다. 치마가 길면 길다고, 짧으면 짧다고 뭐라 할 뿐 아니라, 사모가 무슨 매니큐어냐는 등의 말들도 한다. 어차피 무얼 해도 말이 나올 수 있으니, 그냥 자기가 가장 행복한 길을 선택하면 된다. 사모라는 이유로 행복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남편은 성도에게 말 나오게 하는 아내를 책망하기보다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해줘야 한다. 백 명의 성도가 비난해도 남편 한 사람만 지지해 주면 아내는 행복할 수 있다.
철없던 초보 목사 시절, 나 역시 아내 옷에 대해 지적했다. 색이 화려하면 좀 그렇다고 생각했다. 밋밋하면 그것대로 좀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도 기준과 원칙이 없었다. 아니, 아내를 좀 더 배려하고 사랑하지 못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사모가 된 이후로 남들 다하는 그 흔한 염색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게 맞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모 이전에,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나는 나쁜 남편이었다. 예뻐지고 싶은 것이 본능인 여자의 욕구마저 제한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살아보니, 남들이 우리 가족의 행복을 보장해 주진 않더라.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라 내 행복을 포기한 것이, 결코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바보같이 깨닫는다.
한편 아내 역시 가정에선 아내이자 엄마이지 사모가 아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한 남편의 아내요, 자녀의 엄마인 역할을 사모라는 이유로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또한, 사모인 아내는 유일하게 목사인 남편의 설교와 사역을 지적할 수 있는 거룩한 ‘갑’의 위치에 있다. 모든 갑질이 나쁜 건 아니다. 거룩한 갑질이 있으니 말이다.
남편을 목사와 주의 종으로만 인식하여 그의 사역에 관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돕는 배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사사건건 사역에 간섭하란 의미가 아니다. 남편이 성도를 사랑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물질이나 능력의 유무로 성도를 차별하여 대한다거나,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다면 과감히 혼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욕을 해서라도 기도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모에게 남편은 배우자일 뿐 목사가 아니다. 남편을 목사로 대하는 순간 가정은 삭막해지고 자녀들은 숨 막히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한다. 목사를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 사모의 긴밀한 협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가정은 하나님 다음이다. 목회가 가정의 우선순위를 앞설 수 없다. 가정을 하나님 다음으로 최우선할 때, 가정의 행복은 시작된다. 그리고, 아내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 아내가 곧 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