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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Sep 13. 2017

힐링, 인문학이라는 마약

수단이 되어버린 인문학




  인간은 나약하다. 현실의 삶을 이겨내기위한 뭔가가 늘 필요했다. 희망이든, 종교든, 사랑이든, 가족이든 말이다. 그 중에서도 신에게 많이 의지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많다.) 생의 목표는 오로지 구원이었으며, 신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온 인류가 노력했던 시기였다. 현실세계에서의 고통은 모두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덜어낼 수 있었으며 정치, 종교, 문화 등 인간의 활동에 모두 신이 있었다. 특히 신은 경제적 하층민들에게 각광받았는데, 무엇 하나 의지할 것 없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유일한 삶의 버팀목이었다. 신의 말씀대로, 신의 교리대로만 살아가면 차별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삶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종교의 모습을 두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현실세계의 고달픔을 종교를 통해서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고 의지해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예전같지는 않은 것 같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뿐더러, 믿고 있는 사람들 역시도 신이 자신의 삶에 중심인 경우는 많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이 모두 홀로서는 것은 아니다. 신 말고 다른 대체재를 찾을 뿐이다.




  불황의 시대 속에서 불안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년들도 믿고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명문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은 자신보다 위대한 학교의 ‘이름’을 믿었고 높은 학점을 받은 사람은 ‘A+’에, 높은 토익점수를 받은 사람은 그 ‘스코어’에 의지했다. 하지만 학교의 이름도, 학점도, 영어점수도 의지할 수 없었던 청춘들은 불안감에 떨며 의지할 곳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총체적 난국 속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힐링과 인문학이었다. 

  혜민스님, 법륜스님, 김난도 교수 등 종교인과 교수가 이른바 ‘멘토’라는 역할을 자청하면서 청춘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이해하고 공감해주기 시작했다. 지금 너희들이 어려운 것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토끼도 살고 다람쥐도 잘 살아가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까지. 멘토를 자처한 이들의 책들은 청년들의 불안감을 파고들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출간 8개월만에 100만부가 팔려나갔고 34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였다.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2006년부터 2016년까지 10년간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법륜스님의 책들은 즉문즉설이라는 강연의 내용을 가지고 책으로 엮는데 현재까지 600여회 국내 강연과 유럽·아메리카 대륙·동남아시아·일본 등 해외 강연 115회에 이를 정도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쯤되면 힐링과 인문학 열풍 수준을 넘어서 광풍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힐링, 인문학 광풍이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힐링과 인문학은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를 치료해주었을까? 여러 가지 경제상황이나 대외여건 등을 살펴보면 힐링과 인문학의 열풍이 바꿔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청춘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고,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 순간의 위로만 주었을 뿐이다.




  ‘에구에구, 너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이건 너가 잘못한게 아니니 너무 속상해하지마렴’ 이런 메시지들은 현실의 힘든 삶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을 지탱해주던 중세시대 종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는 영향력이 줄어든 종교 대신에 힐링과 인문학이 그 자리를 메웠을 뿐이었다.




  그렇게 힐링과 인문학은 현대사회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현실세계에서의 청춘들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알고 믿고 의지할 그 무언가의 그 자리를 힐링과 인문학이 꿰찬 것이다. 




  반듯한 대기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있고, 들어가려는 경쟁자의 수는 늘어만간다. 경쟁자의 수준 역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취업을 못한 상태에서 밥을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죄송스럽게 느껴지고 죄책감마저 드는게 현실이다. 내가 마치 밥만 축내는 밥벌레가 된 것 같아 한끼에 5천원하는 식당 밥을 먹지못하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한끼를 때운다. 조금만 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 갈 걸. 공부를 조금만 더 열심히해서 좋은 학점 받을 걸. 토익공부를 조금 더 일찍해서 더 높은 점수 따놓을 걸. 등의 후회로 물든 내 삶 자체가 이미 원죄를 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갑자기 짠 하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이언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와 같이 잘생기고 힘이 센 영웅들은 아니었지만 서울대 교수, 하버드대를 졸업한 스님과 같이 인터넷에서나 존재한다고 믿었던 현실 세계 속 영웅들이 나타나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주었다. 거기다가 “니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라고 말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옳은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게 아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당연히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은 부정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힐링과 인문학의 메시지 역시 그 말이 옳고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무조건 옳으니까. 그리고 그런 메시지를 들은 청춘들은 그들이 원했던 ‘힘’을 다시 냈다.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갈 수 있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한번 도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청년들은 멘토들로부터 힐링과 인문학을 통해서 삶을 살아갈 힘과 의지를 재충전했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은 ‘카타르시스’와 ‘열망’을 동반한다. 최근 인문학 열풍을 이끈 ‘강신주’씨의 강연을 보면 이런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수 있다. 공중파의 인기있던 예능프로그램이었던 ‘힐링캠프’의 출연에서 강신주는 연기자를 꿈꾸는 한 스태프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총 50번의 오디션을 응모하면서 불합격만 하자 꿈을 포기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던 스태프에게 강신주는 “배우가 되고 싶나?”를 반복해서 물었다. 다그치듯이 말하는 그의 화법은 마지막에 “꿈을 이루지 못하면 평생 배회하는 귀신같은 나를 보게 될 거다. 꿈은 없어도 되고 꿈을 꿔도 된다. 그러나 꿈을 꾸면 무조건 이루어야 한다. 꿈을 포기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막상 그 꿈을 이뤄보니 별로일 때 뿐이다”라며 독설로 마무리되었다. 당사자가 처한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는 저 멀리 벗어던지고 꿈을 좇아가라는 그의 답변은 당사자에게는 믿음과 확신을 불어넣어주고 이를 보는 이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보는 이들 역시 당사자와 똑같은 고민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너가 할 수 있어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느낌이 대리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 리딩으로 리딩하라 』 라는 책으로 인문고전 열풍을 가져온 이지성 작가 역시 대중들의 열망을 잘 이용한다. 그는 『 꿈꾸는 다락방 』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작가인데 거기서 R=VD라는 공식을 제시한다. ‘ Realization = Vivid Dream ’에서 따온 공식인데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라는 이야기와 같다. 판도라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모든 나쁜 것이 상자밖으로 빠져나오고 마지막에 남아 있던 것이 희망이라고 했던가.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못난 나에게 ‘희망’만은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주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 이러한 메시지는 현실의 팍팍함을 겨우 견뎌내고 있는 독자들에게 희망이라는 쾌감을 가져다준다. 독자 자신조차도 찾지 못했던 희망을 다른 사람이 그토록 확신해주니 나 역시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지성 작가는 이러한 ‘R=VD’공식을 인문학으로 변형시킨다. 그것이 바로  『 리딩으로 리딩하라 』라는 책이다.  『 리딩으로 리딩하라 』에서 이지성 작가는 인문고전을 통한 자기계발을 강조한다. 인문고전을 읽으면 천재가 될 수 있고 이미 과거의 많은 천재들이 인문고전을 읽어왔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수많은 독자들이 천재가 되고자 인문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원래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오늘날의 인문학처럼 실용성을 띠지 않는다. 어떤 것을 이루기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서 존재했다.




  베블런이 쓴 『 유한계급론 』을 보면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오히려 쓸모없음에 그 목적이 있다. 




  “  남자들의 존경을 얻고 유지하려면 단순히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존경받으려는 자는 부와 권력을 그 증거로 제시해야 한다. 존경받기위해서는 반드시 그 증거를 제시하고 판정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부의 증거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력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고 또 그를 유력한 인물로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을 생생하고 빈틈없이 유지 시키는데 이바지 할뿐 아니라 자기 만족감을 높이고 유지하는데 적잖은 역할을 한다.


노동에 불참하는 것은 명예롭거나 칭찬받을 만한 행동일 뿐 아니라 바야흐로 체면을 유지하는데도 필요한 행동이 되기에 이른다. 금력만이 명성을 얻는데 필요한 근거라고 고집하는 것은 금전을 축적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매우 고지식하고 오만한 처사이다. 노동에 불참하는 것은 금력을 증명하는 관습적 증거이고 바로 그 덕분에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관습적 징표이기도 하다. 금력의 가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여가에 대한 훨씬 더 강력한 강조로 이어진다.  “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생산성과는 관련이 없는 학문이다. 산업공학이나 건축공학, 생명공학 등과 달리 철학, 역사, 문학과 같은 학문 등은 생산성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인문학은 베블런이 말하는 노동에 불참하는 것, 체면을 유지하는 행위에 가깝다. 




  조선시대에서도 공자왈 맹자왈 책을 읊던 선비들은 밭에 나가 쌀한톨 생산하지 못했다. 원래 돈이 많은 양반집에서나 그런 책들을 읽었고,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는 지아비가 책을 읽는 동안 아녀자들이 죽도록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렸다. 참다못한 아녀자가 돈이나 벌어오라며 지아비를 쫓아내자 독과점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한 허생의 이야기는 몇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내려온다. 




  이처럼 당장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루종일 생업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 역사, 희극, 비극 같은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다. 그런 것에 시간을 할애하면 그만큼 생산활동을 하지 못하게되어 내 생계가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대한민국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뭔가 좀 다른 것 같다. 비실용적이었던 인문학이 굉장히 실용적인 학문이 되었다. 성공과 부를 위해서 인문학을 배우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세계적인 인문학 코스로 유명한 클레멘트 코스를 한번 살펴보자. 클레멘트 코스의 창시자인 얼 쇼리스의 저서 『희망의 인문학』에서는 클레멘트 코스의 예비 수강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한다고 적혀있다.




  나는 여러분을 록펠러처럼 부자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여러분은 록펠러보다 더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록펠러 집안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 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앞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면 여러분은 ‘부’를 누리게 될 수 있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런 클레멘트 코스의 효과를 인정해서인지 우리나라 정부에서도 한국판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서 노숙자들을 상대로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단순히 이 뿐만이 아니다. 삼성, 현대차, 국민은행, 신한은행, 현대산업개발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도 인문학을 채용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의도로 인문학 도서를 토대로 구직자들을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채용시장마저 인문학으로 평가를 하다보니 더 이상 인문학은 인문학이라는 고고한 학문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자기계발과 채용시장의 스펙으로 이용되기시작하면서 그 어떤 학문보다도 실용적이고 유용한 학문이 되었다.




  인문학에 대한 정의는 수도없이 많다. 서강대학교 최진석 교수는 인문학에서의 인문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정의한다. 인문학은 인간 그 자체가 남긴 흔적, 인간을 공부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인문학 페티시즘』의 저자 이원석씨는 인문학을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꿈꾸며 이를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의 규칙을 넘어서서 자기만의 규칙으로 뚜벅뚜벅 걸어갈수 있는 힘, 세상이 새겨놓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을 인문학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인문학은 오히려 세상의 규칙에 더 잘 순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누군가에게는 취업을 시켜주는 학문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부자 혹은 천재로 만들어주는 학문으로,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팍팍한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히로뽕 같은 학문으로 말이다.




  이러한 힐링과 인문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에게 부담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개인들이 버텨낼 수 있게끔 한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열정의 땔감이 되어 절망의 무게를 견뎌내는 힘을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닌 지금의 사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구조의 붕괴를 막아내는 지지벽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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