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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자본가 Oct 17. 2017

무엇이든지 할수 있는 사회에서 할 수 없는 단 한가지

궁극의 착취 - 나 자신을 내가 착취한다

궁극의 착취 - 나 자신을 내가 착취한다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한 그와 정반대로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는 법이다. 피지배계급 없이 지배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며, 지배계급 없이 피지배계급이 존재할 수 없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존한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계’에 있어 다를 것이다. 동전의 양면은 앞과 뒤가 서로 수평적으로 대등하다. 하지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대등하지 못하다. 이 둘의 관계는 수평이라기보다는 수직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이 위를 차지하고 피지배계급은 아래에 위치하게 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아래에 있는 것들을 좀 더 많이 가져올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착취’라고 한다.






  우리가 돌탑을 쌓는다고 해보자. 탑의 대부분은 아랫부분이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그런 모양의 탑이어야 그 탑이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탑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역시 이러한 탑의 구조와 마찬가지다.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배계급은 소수여야 하고, 아랫부분에 위치한 피지배계급은 다수여야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안정적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단, 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위와 아래의 관계가 지나치면 아래에서 위를 전복시키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늘 고심하고 노력한다. 항상 착취를 교묘하게 해서 피지배계급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쓴다.








  한병철 씨가 쓴 『 피로사회 』 라는 책을 보면 초기 산업사회에 비해 착취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초기 산업사회에서는 규율이라는 부정성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해서는 안된다’로 설명되는 부정성은 금지를 통해서 성과의 효율을 뽑아내려 하였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 일과 관련되지 않은 모든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런 구조 속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찾게되고 관리, 통제가 자유를 억누르는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분노는 기존의 지속되던 상황을 중단하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분노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착취하고 있는 지배계급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는 피지배계급 자신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노동조합의 노동쟁의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투쟁하는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규율을 통한 통제로 운영되는 부정성의 시스템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생산성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이 오히려 그 이상의 생산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싫은 일을 억지로 어느정도는 하게끔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가진 잠재력을 모두 이끌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엄마의 강요로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의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억지로 공부를 시켜서라도 명문대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하루종일 학원 스케줄과 독서실 스케줄 관리는 물론이고 1년 단위로 학습 계획까지짜서 그야말로 숨쉴틈조차 없는 완벽한 학습계획을 수립하였다. 아이가 학교가 끝나면 엄마는 학교 앞에서 차를 태우고 다음 학원으로 이동하고, 또 학원이 끝나면 다른 학원으로 이동해가며 만들어놓은 플랜을 수행하게 한다. 아이는 엄마가 그렇게 자신을 졸졸 따라붙어다니니 엄마의 계획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어디로 다른 곳으로 샐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아무리 감시와 감독이 심하다고 해도 아이가 화장실을 가거나 학원과 엄마의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의 시간까지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아주 작은 틈. 아이는 그 틈을 찾고 노린다. 그 작은 틈만큼은 자신이 하고 싶은 휴대폰 게임이나 친구들과의 장난 등을 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아이의 온 신경은 그 틈을 찾는데 혈안이 된다. 무슨 활동과 무슨 활동 사이에 몇 분의 시간이 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없던 틈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집중력에 한계를 가져온다. 금지의 부정성이 어느 정도까지는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일정수준에 오르면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성을 기반으로 생산성을 통제하던 규범사회는 긍정성을 기반으로 하는 성과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예스 위 캔’으로 설명되는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의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 법률로 운영되던 규율사회와 달리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자기 자신을 주인이자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규율사회에서 외적인 기구가 자신을 통제하고 규율했다면, 성과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를 통제하고 규율한다.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몰아친다.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 터무니 없는 목표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기자신을 목표에 가져다놓고 끊임없이 통제하고 강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통제와 강제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에 의해 이뤄지는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 된다. 타인에 의해 통제되고 강제될 때 느껴지던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타인보다 더 엄격하고 효율적으로 자기자신을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자기자신을 착취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채 착취에 몰두하는 상태. 나는 이런 형태의 착취를 궁극의 착취라고 부른다. 이런 궁극의 착취에 빠지게되면, 사회구조문제로 돌려야할 모든 책임들이 자기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궁극의 착취로 완성된 착취 시스템은 그 어떤 시스템보다도 효율적이고 견고하게 된다.





  내가 하루종일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한 이유를, 내가 몇 년의 월급을 모아도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이유를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로 생각한다. ‘내가 명문대를 나오지 못했으니까’ ‘내가 더 아껴쓰지 못했으니까’ ‘내가 무능력해서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으니까’라고 생각할뿐,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정치때문이야’ ‘최저임금이 낮고 고용안정성을 저해하는 제도때문이야’ ‘회사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경영진과 오너일가 때문이야’라고 분노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어렵게 된다.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엇이든지 가능한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에 불가능에 대한 변명이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명문대를 나오지 않아도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존재하며,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치가 무능하더라도 양질의 일자리가 (그것이 설령 극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여전히 존재하며, 최저임금이 낮고 고용안정성을 저해하는 제도가 있음에도 고용안정성이 보장되고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은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지 사회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구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었다는 변명은 잘 통하지가 않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 처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력 뿐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재능이나 적성과 같은 선천적인 요소보다는 후천적인 요소인 노력이 제일 중요하게 된다.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노력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노력부족의 논리는 ‘노력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가난한 집이어서 과외도, 학원도 하나 하지 못했지만 하루에 4시간씩만 자서 서울대학교를 들어간 공신의 이야기나, 제대로된 스케이트장 하나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수만번의 점프와 넘어짐을 반복하며 탄생한 피겨여왕의 이야기 등은 마치 신화 같이 구구절절 이어져 후대에게 너희들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다는 ‘노력의 신화’를 지속적으로 주입시킨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루에 4시간씩만 잔다고 해서 모두가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빙상장에서 수만번을 넘어지고 점프해도 모두가 피겨여왕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할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원인을 자신의 노력부족에서 찾고 자신이 더 노력하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에게 우울증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개인의 무기력함은 삶의 무의미로 이어지고, 삶의 무의미는 우울감을 가져온다.



 

  이렇게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지어지는 순간, 그 누구도 사회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회 구조를 바꿀 그 시간에,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여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결국 나 역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 




  궁극의 착취는 그렇게 착취를 당하는 피지배계급조차도 착취를 당한다는 인식조차 없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더 열심히 노력만을 하는 피지배계급의 안간힘은 착취를 하고 있는 지배계급에게 더 큰 이익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노력들의 성과물을 누군가가 빼앗아간다는 인식이 생기면 전력으로 그 일을 행하기 어렵다. 억울함과 분노 등이 최고의 효율을 달성하는데 본능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이 온전히 나를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을 갖게되는 순간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을 넘어서 잠재력이 폭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최고의 성과는 달성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잠을 스스로 줄이게 만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자책한다. 끊임없이 "할수 있다" " 할수 있어" 를 외치면서 자신을 더욱더 혹독하게 조련한다. 그 시련만 이겨내면, 그 어려움만 이겨내면 굉장히 달콤한 보상이 있을 것으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일부는 그 달콤한 보상물에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다수는 중간에 탈진하고만다.  스스로에게 정해놓은 엄격한 기준선은 본인을 옥죄는 밧줄이 되고만다. 그렇게 스스로 자기 목을 조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살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느끼게 된다. 주변에서 아무리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더라도 들리지 않는다. 스스로가 정해놓은 그 선을 충족시키지 못한 나는 그 어떤 존재도 가치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할수없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무력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사람의 가치는 오로지 성과와 성취이다. 성과가 나오면 그 사람의 인성이 아무리 나빠도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사람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무능하고 가치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여기서 핵심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맨다는 것이다. 그 누가 조이지 않았음에도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지 못하면 어떤 사람이다 라는 건 그 누구도 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혼자 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한 기준에 자신을 가져다 대기 시작한다.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인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




이런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할수 없다"라는 말을 할수 없게 되었다. "할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무능력하고, 무가치하고,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할수 없다"라는 말은 금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악순환을 끊을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존재이다. 내가 할수 있으니 너도 할수 있다 라는 식의 논리는 하나의 폭력이다. 나 자신의 개성과 특성을 몰개성으로 만드는 폭력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용기를 내야 한다.


누군가 "넌 할수 있어"라고 말을 할때, "할수 없어"라고 말하는 용기 말이다. "할수 없다"는 말은 무엇이든지 가능한 사회속에서 나 자신을 지킬수 있는 유일한 방패이자 무기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착취를 그만둘 수 있다. 거기서부터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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