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 않은 자. 먹지 못한 자.
부스에 갇혀 첫 출근을 후덜덜하게 보낸 나.
(이전 편 참조.)
어찌어찌해서 하루하루를 견뎌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S그룹의 이러닝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화이팅을 외쳤다.
잘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사수는 나를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같은 눈으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
TMI로 설명을 덧붙이자면.
우리 회사에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획설계팀이 2개였는데,
나는 처음부터 우리팀의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팀으로 불려가 그쪽 팀에 배정된 일을 하게 된것이었다.
그 얘기는... 천사같은 우리 팀장님이 나를 이 프로젝트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 이제 막 대학졸업한 시닙이였던 나는 한치앞도 모르고 그냥 열정만 앞섰던것이었다.
게다가.
S그룹의 콘텐츠 담당자(a.k.a 고객님)는 서울대를 나온 K대리.
사람을 볼 때 호의적으로 보지 않고 약간의 삼백안을 뜨고
위아래로 치켜 보는 스타일이었다.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나는 회사 밖에서도 잡아먹힐 것 같은 부들부들 떨고 돌아다니는 새끼양같았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고객님과의 상견례를 마치고, 과목을 배정받고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러닝 콘텐츠의 제작과정은
1.원고작성(고객사의 SME(Subject Matter Export: 내용전문가)나, 외부 교수님이 한다.)
2. 원고를 바탕으로 기획서 작성(이건 주로 기획자, 기업체나 기관 담당자와 이러닝 개발사의 기획자-나같은 사람이 같이 하거나... 업체의 기획자가 한 후 컨펌 받는 형태)
3. 기획서가 통과되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보드 작성(이러닝 개발의 기본, 토대, 뼈대. 방송으로 치면 콘티라고 보면 되고, 아주 세세히 작성한다.)
4. 스토리보드 바탕으로 개발(UI, 캐릭터(2000년대 초반에는 캐릭터가 꼭 있었다.), 페이지 디자인, 나레이션 등을 녹음해서 입힌다. )
5. 개발물 검수
6. 최종 완성
각 단계마다 당연히 고객님의 컨펌이 들어가고,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는 절차를 거친다.
원고작성은 고객사에서 직접했으니 큰 문제는 없었고,
기획서도 어찌저찌 잘 통과가 되었다.
스토리보드 작성... 이건 내가 신입이였기 때문에 잘 할리가 없었다.
매일 늦게까지 작성을 해서 (남의 팀)팀장님께 피드백을 받아 고치고, 울면서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수정된 스토리보드를 고객님이 보시는데...
깐깐한 K대리는 사사껀껀 불만 투성이였다.
나름 공부잘해서 H대를 졸업한 나에게 초등학교도 안나왔냐... 는 막말을 하루에도 몇번씩 해댈 정도.
이때만 해도 나는 다시는 서울대 나온 사람과 상종을 안하겠다 마음먹을 정도였다.
매일 이렇게 욕먹고 스토리보드를 고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하루에도 수십번씩 전화를 해서 수정사항을 던져주던 그녀...
집에도 못가고 매일 남아서 수정하고, 그녀가 출근하기 전에 수정본을 보내주고.
나는 그 사이에 잠깐 집에가서 씻고 다시 출근하기를 몇 주...
일주일에 두세번은 회사에서 디자이너 언니와 밤을 새며
개발을 해 나가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하면 완전 왕 갑질. 신고를 해도 오만번은 했을것이다.)
그녀는 고객사의 대리님이었고, 나는 을의 신입사원이니...
그녀가 아무리 꼬리를 밟아도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일하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눈물의 빵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은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토요일이었다.
나는 불타는 금요일에도 집에가지 못한 채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에 갔고,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갑: 개발물을 확인했는데, 수정할 게 너무 많다. 디자이너와 같이 사무실로 출근해달라.
-을: 디자이너는 오늘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체크해서 전달하겠습니다.
-갑: 떨떠름... 알았다. 그럼 점심 전에 너네 회사로 내가 가겠다.
나는 부랴부랴 세수만 하고 또 회사로 출근을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안보이고, 출근을 했더니 옷이 다 젖어있을 정도였다.
12시가 좀 안되었을 때
그녀가 당당히 자기 회사인듯 아무도 없는 우리 회사로 들어왔다.
토요일 오전에 쉬지도 못하고 밥도 못먹고 출근한 불쌍한 신입이. 그게 바로 나.
그녀는 또각또각 들어와서 내 오른쪽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갑: 1차시 1페이지부터 봅시다. (총 20차시고, 1차시당 15페이지 정도)
-을: 네...
그녀는 내가 페이지를 열면 그제서야 쭉 보면서 하나씩 수정사항을 주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지금처럼 영상기반이나 플래시가 아니고,
손으로 짜는 html이어서 간단한 텍스트 정도는 바로 수정할 수 있었기에
그녀가 텍스트를 수정하라고 하면 나는 바로바로 html페이지를 열어서 수정을 하고,
내가 수정할 수 없는 디자인은 체크해 가며 한페이지씩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자기 오른쪽에 빵을 올려놓고 뜯어먹는 것이었다.
먹어보겠냐고 말도 안하고.
나도 아침도 안먹고 호출하는 바람에 배가 고팠는데...
한참을 빵을 뜯어 먹다가 그제서야 내가 왼쪽에 있다는게 생각이 난걸까?
그제서야 물었다.
-갑: 아. 뫄뫄씨 배 안고픈가?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나는 빵을 먹어서 괜찮으니까 그냥 쭉 보는게 낫겠지?
-을: 예? (미친거 아니세여? 너님만 배부르시겠져)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갑: 그래 그냥 빨리 보고 집에 가자...
눈물이 눈물구멍바로 직전까지 차올랐다.
먹어보겠냐고 물어봤어도 나는 그녀가 사온 빵을 먹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큰 사무실에 둘이 덩그러니 앉아서 일하고 있는데
그건 아니지 않나?
당장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가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었다.
그렇게 몇시간을 더 본 뒤, 5시가 넘어서야 그녀는 먹다 만 빵봉지를 꽁꽁 싸매고 가방에 넣은 후
사무실을 나섰다.
주말에 출근시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배고프겠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라. 라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자기는 일을 마쳤으니 너는 정리하고, 주말동안 수정해서 월요일에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식으로
신입이를 폭풍우 치는 사무실에 홀로 남겨두고
총총이 떠나갔다.
그녀가 문을 닫는 소리가 나자마자
나는 울었던 것 같다.
내가 이럴려고 고 3때 4시간씩 자고 공부했나. 이럴려고 취직했나.
이렇게 해서 얼마나 번다고 이러고 있나.
서울대를 안가서인가? 그녀는 나를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무시를 하는가!
별의별 생각을 다하면서 한참을 울다가 폭풍속으로 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것도 같다.
그때 시작한 일을 20년이 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그날의 습도, 빗소리, 폭풍우 치는 소리,
그녀의 구두소리, 빵냄새, 빵 봉지를 싸매던 뽀시락 소리,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하나의 에피소드이지만,
그 후로도 그녀는 너무나 악랄하게 과정개발을 마쳤다.
우리 회사 사무실이 자신의 사무실인듯 와서 갑질을 해댔고,
나는 거의 매일 그녀때문에 울었고, 그녀의 전화벨 소리 때문에 경기했으며,
회사에서도 몇번이나 고객사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S그룹은 회사로서는 대형 고객사였지만, 이 프로젝트로 너무 많은 피해를 받은 회사에서는
이후로 K대리와 하는 일은 보이콧하고 하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해방된 후 8년 정도 지나서, 나도 대리를 달고 어느정도 이 업계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
한 기업체 연수원에 회의를 갔다가 그곳에서 차장을 달고 있는 그녀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 **과정 뫄뫄씨가 담당한거야?
-나: 네. 제가 만든거예요.
-그녀: 많이 컸네. 잘했던데?
-나: 감사합니다.
그 연수원은 산속에 있어서 집에 가는 차를 타려면 조금 걸어서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나와야 했다.
그녀를 피해 얼른 나오고 싶었는데, 그녀가 자기도 퇴근할거라며 나를 쫓아 나왔다.
그녀와 함께 걷는 것이 진짜 싫었지만... 나는 또 한마디 못하고 그녀의 빠른 걸음을 따라 걸었다.
연수원에서 정류장까지 얼마 안되는 그 시간이 억겁의 시간 같았다.
-나: 아참, 차장님. 아이는 잘 있나여? 엄청 컸곘네요.
적막을 깨고자... 그나마 그녀가 아이 얘기할때 즐거워했던 것이 생각나 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대답없이 몇 걸음을 걸었다.
-그녀: 아이는. 하늘나라로 갔어. 내가 벌받은 것 같아.
그 뒤로 버스 정류장까지 우리는 한마디 하지 못하고 걸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나는 후배들에게 더 잘해주려고 한다.
신입사원, 나와 갑을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존중해주려고 애쓴다.
물론 나도 어느 순간에는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 최대한 노력하려고 한다.
내가 받았던 그 수모와 기분을 타인에게 주지 않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질긴 S그룹과의 악연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