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되돌아보면 상처를 남용했다. 과거에 만났던 한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 때문에 현재의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과거의 한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다 넘어진 상처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사람들에게 의지는 커녕 거리두기를 했다. 상처를 핑계대는 나에게 작가는 한 마디 던진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상기됐다. 그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이 사람에게 투영할 이유가 없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이 사람은 이 사람이다. 그 일이 마치 일어나지 않은 듯 애써 잊거나 부정할 필요도 없었고,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며 정당화할 필요도 없었다. 내 인생의 전부로 과장할 필요 없이 내 삶의 일부로 인정하기만 하면 됐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고 한다.
결론 말고 결심
말할 때도 결론부터 말하고, 상대방 말에 서론이 길면 “그래서 결론이 뭐야?”라고 물었었다. 상사한테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엄마에게만 했던 것 같다. 엄마 죄송해요. 다음부터 안그럴게요. 그래, 이거다. 작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라고 한다. 어릴 때는 대단한 성취와 결과가 중요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대화를 하는 것이 성공만큼 혹은 그 이상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로나로 인해 소소하고 당연해 보이던 일상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 돼버렸다. 삶을 대하는 결심 혹은 태도 중 추가하자면 나를 연민하지 않기로, 피해의식을 갖지 않기로 했다. 작가는 책에서 미국 전 대통령 닉슨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훌륭한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이 케네디에 대한 열등감으로 불법 침입 및 도청, 거짓 증언과 은폐의 이미지로 낙인 찍혔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는 루 살로메다. 예전부터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모르파티
내가 좋아하는 루 살로메를 이 책에서 발견하다니. 루 살로메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가 니체는 물론 작가 릴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 등 당대 유럽 최고 지성인들을 매혹한 뮤즈다. 루 살로메라는 지적 팜므파탈을 만난 이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여러 책을 집필했다. 루 살로메는 니체의 사랑을 거절하며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녀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시간마저 모두 부정하지 않는다.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 가장 아픈 순간마저 얼마든지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한다.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아도 좋다! 무한 반복(니체의 언어로 “영원회귀”)! 인생이 너무 힘들면 이번 생은 망했다며 다음 생을 생각하고, 인생 초기화 버튼이 있다면 누르고 싶고, 기억을 완전히 삭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다. 그리고 그런 소재는 영화에도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삶은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남았으며 우리에게는 이런 삶을 영원히 반복해도 좋을만큼 극복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니체의 언어로 “위버멘쉬”). 내 인생을 긍정하고 내 운명을 사랑(니체의 언어로 “아모르파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때의 최선을 다했던 과거의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니 예전보다는 더 자존감과 자신감이 높아진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요즘에는 억지로라도 눈웃음을 짓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사람이 되려고 연습하고 있다. 한 때 숨기거나 지우고 싶던 과거도 이제는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나를 사랑해”라고 농담같은 진담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