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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Nov 09. 2020

서평.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파르크 슐링크

‘정의란 무엇인가'의 러브스토리 버전이다. 딱딱한 법철학에 부드러운 사랑을 씌운 셈이다.


몸이 아파 길거리에서 구토하던 소년을 한 여인이 도와주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여인을 찾아간 소년은 여인의 집에서 목욕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스타킹을 다리 위로 끌어올리는 에로틱한 장면이 뇌에 각인되면서 소년은 계속 여인을 찾아간다. 여인은 소년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만날 때마다 소년은 책을 읽어주고, 목욕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소년이 여인에게 길들여져 간다고 생각한 이유 소년이 15살이고 여인이 36살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 현 프랑스 영부인도 대통령보다 20살 이상 연상이니까 - 15살 소년이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다행히 여인은 소년에게 공부하지 않을 거면 집에 오지 말라고 하며 공부에 매진할 것을 오히려 독려했고, 다행히 소년은 여인 덕분에 더 독립심있고, 책임감있고, 성적도 좋은 학생으로 법대생이 된다.


어느 날 홀연히 여인이 사라지고 몇 십년이 지난 후, 재판장에서 여인은 피고로, 소년은 대학생 참관인으로 재회한다. 여인은 나치 일원으로 유태인을 사형실로 안내하는 수위였다. 왜 가스실로 사람을 안내했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니까 공간이 필요해서요” 라고 답한다. 나를 포함해 답을 들은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나는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질문받은 판사도 이론적인 얘기만 했다. 사회를 위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이 희생되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국방, 경제 등 다양하다. 그래서 군복무를 하고, 파병이 되고, 초과근무를 하고, 대량해고된다. 하지만 한 개인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즉 동등한 개인에게 어느 정도 강요할 수 있을까? 질서가 자유보다 중요할까? 반대로 자유가 질서보다 소중한가? 이 책은 마치 폭력의 연원을 찾아간 듯했다. 서로 의견이 다른 이유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치관을 타인에게 한 번 말하면 제안, 두 번 말하면 압박, 세 번 말하면 강요가 되고, 계속되면 폭력, 나아가 나치의 대량학살처럼 폭력이 걷잡을 수 없이 극대화된다.


여인은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살상 보고서를 자신이 작성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결국 무기징역 선고를 받는다. 나도 물론 소년은 그런 선택을 한 여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맹이라는 사실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창피한 일인가? 그런 자존심, 허영심이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가? 소년은 철학자인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타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으며, 우위를 과연 판단할 수 있을까?” 반문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고, 그 가치관을 위해 죽는다. 사랑을 위해, 증오하니까, 복수하고 싶어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돈 때문에, 권력을 얻고 싶어서 살고, 남을 죽이고, 나를 죽이는 경우도 있다. 그게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내가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선택을 고민하는 것은 어느 것이 우선순위인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하거나 옳은 선택이 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까?


말하는 건 쉽다. 대량 살상 명령을 거절했어야죠! 이론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말한 것처럼 하급 관리인은 상급 지도자와 달리 악의를 품고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다. 수감인들을 가스실로 이끈 것은 오늘 일어나서 샤워하고, 책을 읽지 못해 듣는 것을 좋아하고, 빨리 퇴근해서 집에 가고 싶어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안타깝게도 여인은 교육은 커녕 글자 한 자도 읽지 못한다. 또 소년과의 교류가 유일한 사회적 접촉이다. 이렇게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람과의 교류도 거의 없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는 분별력이 생길까? 어쩌면 이 여인은 감옥보다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여인은 석방일에 자살을 선택한다. 소년과의 사랑이 식어서, 소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감옥에서 글을 깨우치면서 나치 수용소에 대해 배우게 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꼬박꼬박 모은 돈을 재판 관련 유대인에게 기증할 것을 소년에게 부탁한다. 유대인은 이 돈을 갖고 속죄받을 것을 기대했다면 어림도 없다며 차라리 문맹비영리재단에 기증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소년은 그 돈을 유대인 문맹퇴치 사회단체에 기부한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양하듯,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다양할 것이다. 최근 자살 사건이 몇 차례 있었는데 안타까우면서, 화도 나면서, 공감도 되다가, 이해가 가지 않다가, 마음이 바뀐다. 결론은 내가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상황을 상상은 커녕 모르므로 판단을 유보하기로 한다. 소년은 범죄자인 여인을 사랑했다는 죄책감, 동시에 누명을 썼는데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수감 기간 동안 여인에게 책을 읽은 테이프를 보내고, 사후에도 유언에 따라 기증 과정을 돕는다. 타인의 삶에 방문하는 것은, 타인을 내 삶에 초대하는 것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같다. 사소한 스침이었을 수 있는데, 소년은 평생 이 여인의 영향을 받았고 평생 잊지 못한다. 법정스님의 “인연을 함부로 맺지 마라"는 말씀도 생각이 난다.


남을 도와주거나 조언하기도 조심스러워진다. 돕기 전에 물어보자. 상대방이 도움받길 원하는가?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한 조언, 요청받지 않은 도움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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