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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Nov 17. 2020

서평.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가르쳐주신 여러 교수님들께서 공통적으로 강조한 게 있다. 바로 신문 읽기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보다 더 중요 것은 읽는 것 자체보다 어떻게 읽느냐이다.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사를 왜 썼을까, 의도가 무엇일까, 기사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생각하며 비판적으로 기사를 읽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보지 않는 뉴스가 있는데 연예계 소식이다. 너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고, 대부분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히 1990년대 걸그룹 뮤비를 봤는데 첫 느낌은 “아, 옷을 너무 많이 입었네?” 이다. 반대로 말하면 2000년대 걸그룹이 “와, 옷을 너무 많이 벗었네!” 이다. 요즘 기사를 보면 독자로서 선정성에 너무 익숙해져서 선정적이라는 인식조차 못한다. 심지어 무미건조한 사실인 기사는 지루하기까지 하다. 이 책이 이런 경각심을 일으켰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는 민간인 카타리나 블룸과 기자 베르너 퇴트게스가 등장한다. 블룸이라는 일반 시민이 한 파티에서 괴텐이라는 사람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괴텐은 강도 및 살인 용의자라서 경찰 및 기자가 추적하고 있었고 기자가 이 하룻밤에 대해 대서특필한다. 기사 첫 문장은 이렇다: “강도의 정부 카타리나 블룸이 신사들 방문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일단 괴텐은 강도 및 살인 혐의자이다. 정부라는 사실이 확인이 됐는가? 그 날 둘이 처음 만났는데? 괴텐 말고도 남자들이 많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신사들의 방문? 마치 고급 매춘녀인 것처럼 기사를 쓰고 있다.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 기자는 블룸과 괴텐이 한 팀이라는 프레임을 이미 짜놨다.


섹스


“말이 길지 않니?” 이렇게 말하면 짧게 말해라는 뜻이다. 모든 말에는 의도가 있다. “춥지 않아?” 창문 닫아달라는 얘기다. 모든 글과 말에는 의도가 있다. 기자는 기사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게 프레임이다. 핵심은 강도의 행적을 쫓는 게 아니라 블룸 사생활을 파헤치는 것이다. 기자는 크게 세 가지 프레임을 사용한다: 섹스, 이념, 경제적 약자의 악용. 영어로 sex sells 라는 표현이 있다. 성적인 것은 누구나 호기심이 있어서 누구나 다 읽고, 보고, 관심을 가지므로 잘 팔린다는 뜻이다. 물건이든 기사든 성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면 이게 본질인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연이은 기사에 나온 표현은 “살인범의 정부”, “살인범 강도범의 애무" 이다. 생각 없이 읽으면 기사를 그대로 수용한다. 기사를 본 사람들은 블룸을 창녀라고 하고, 무시하고, 치근덕거리고, 공산주의의 암퇘지라고 부르고, 블룸은 음란전화, 음란 우편물까지 받는다. 성적으로 약자인 여성, 그것도 젊은 여성, 이혼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려 마치 누구나와 자는 이 여자는 나랑도 잘 수 있을 것같은 뉘앙스를 풍기면서 성을 이야기로 판다.


이념


기사는 강도 및 살인사건에서 이념을 끼워 판다. 이 프레임은 보수 극우 언론이 잘 사용한다. 모든 것을 좌파로 몰아간다. 80, 90년대 일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난다. 한국에서는 좌파, 빨갱이라고 몰아가고, 미국 경우 테러리스트로 몰아간다. 기사에서 쓰는 용어도 “음탕한 공산주의자” 이고 블룸을 도와줬던 블로르나 부부에 대해서도 “빨갱이 트루데” 라고 하고 “보수 정치가가 좌파 변호사에게 폭행당하다” 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경제적 약자


기자는 애초에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실태를 고발하기는 커녕, 소송 등을 통해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블룸을 겨냥했다. 블룸이 경제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집에서 요리, 청소하는 가정부, 관리인이다. “어떻게 일개 가정부가 폭스바겐을 소유할 수 있나” 의문을 던지고, “신사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의혹을 제기하고, “비싼 반지”도 언급한다. 악성 댓글이나 허위기사 때문에 과거 연예인들이 자살했다면  요즘 연예인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한다. 만약 블룸이 이혼을 했고 남자를 만나더라도 신문 최대 광고주 재벌 상속녀라면 이런 기사가 났을까? 블룸은 결국 언론에 의해 명예를 실추당하고 사회적으로도 구제 받지 못해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안타까운 선택을 한다.


기사의 핵심은 사실적 증거이다. 기자 퇴트게스는 블룸 주변인을 참고조사한다. 하지만 블룸에게 긍정적인 “영리하고 이성적이다”는 묘사는 “얼음처럼 차갑고 계산적이다" 라고 뒤바꾼다. 블룸과 괴텐이 처음 만난 것이라는 친구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둘이 다정하게 춤을 춰서 처음 만난 사람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다” 라고 증언을 왜곡까지 한다. 친하지도 않은 블룸 지인의 증언에 따라  “창녀같다"라고 하고, “기이하고 새침하다” 라고 한다. 암 수술 직후 블룸의 어머니를 병실까지 찾아가서 무리하게 인터뷰를 하더니 어머니가 사망하자 “어머니의 죽음에도 울지 않는 극도의 변태같다”라고 기사에 쓴다. 


우리 누구나 블룸이 될 수 있다. 오해와 모함을 받고 루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타겟이 되는 것보다 더 쉬운 건 이 기사를 소비함으로써 2차 피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기사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소비하기 때문이다. 경각심을 갖고 소비하지 않는 불매운동이 언론의 피해자를 줄일 수 있는 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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