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고 화려한 젊은이의 연애보다 늙고 병들어도 옆을 지켜주는 노부부의 사랑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사랑이 있기나 한걸까, 연애와 결혼은 결국 거래와 번식이 아닐까, 하며 시니컬해질 무렵, 나태주가 아내를 위해 쓴 시를 엮은 시집을 보며 메말랐던 마음이 다시 말랑말랑해졌다. 나태주의 베스트 컬렉션 시집보다 이 시집이 제일 좋았다. 내가 꼽은 6편을 소개한다. 사랑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알짝 열어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 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이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이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부부 2
오래고도 가늘은 외길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만나 자주
다투고 울고 화해하고 더러는
웃기도 하다가 이렇게 늙어버렸다
고맙습니다
부부 1
겨우 겨우 두 마리 짐승이 되다
마주 누워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거꾸로 누워 맨발바닥을 주물러 주기도 하고
잠을 잘 때도 마주 잡은 손 쉬이 놓지 못한다
겨우겨우 짐승이 사람보다 윗질인 것을
알게 되다
그 날 이후
병원에 다녀온 뒤 몸이 더 작아졌고
직장을 그만둔 뒤 마음이 더 작아졌다
날마다 집에서만 지내다가
가끔은 아내 따라 시장에도 간다
아내가 생선을 사면 그것을 들고 다니고
아내가 잔치국수를 먹자 그러면 잔치국수를 먹는다
잔치국수 값은 2천 5백원
오늘은 이것으로 배가 부르다
개처럼2
새벽에 깨어 서너 시간 글 쓰고
동이 틀 무렵 다시 자리에 누워
늦잠이 들고 말았다
아마도 죽은 듯 꼼짝 않고 자고 있었을 것이다
자다가 부시시 눈을 떠 보니
누군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
안방 침대에서 자고 있던 아내가
잠 깨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당신 왜 거기 그렇게 앉아 있는 거야?
당신이 안 일어나길래 여기 이렇게
개처럼 앉아 있는 거예요
개처럼?
우리는 또 그 ‘개처럼’이란 말에 마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개처럼 1
아침 밥상에 모처럼
익힌 꽃게가 한 마리 통째로 올라와 있었다
꽃게가 담긴 접시를 들고 식탁의
구석진 자리 의자에 가 앉았다
왜 귀퉁이에 들어가 앉고 그래요?
응, 어렸을 때부터 맛있는 것이 있으면
구석진 곳에 가서 먹었거든
개처럼?
비유가 좀 그렇다!
우리는 마주보며 모처럼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