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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n 17. 2022

[산티아고 순례길] 레자마 4


피에르와는 시절인연이 다했는지 나보다 앞서가기 시작했다. 피에르와 만난 처음부터 속얘기를 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대화거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자신은 어제 조금 걸어서 오늘은 많이 걸을 예정이라며 빌바오에서 만나자, 라는 말을 남기고 피에르는 떠났다. 무니티바르에서 빌바오까지는 43km다. 역시 잘생긴 것들은 소용이 없다. 루이와는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지만 피에르보다는 날 더 많이 챙겨줬다. 이거 먹을래? 좀 쉴까? 사진 찍을래? 표정, 손짓, 발짓으로 루이의 착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루이가 하는 중국어든 스페인어든 미리 공부해놓는 거였다. 

어제 요가를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같이 할껄. 아침인데도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발바닥이 많이 아팠다. 살면서 거의 신경쓰지 않았던 신체 부위가 제일 신경이 많이 쓰였다. 다리와 발 마사지를 했어야 했는데 잘생긴 청년 요가하는거 본다고 막상 내 몸은 보지 않았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나 때문에 늦게 가는 것같아 루이에게도 먼저 가라고 말하고 나는 쉬기로 했다. 애매한 시간이라 빵집에서 바게트를 샀다. 여기 바게트는 속은 부드럽지만 겉은 딱딱해서 입 천장이 아프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하겠지만 길 옆 구석 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발바닥을 식히고 배를 채웠다. 중국계 프랑스인 실비아는 반도 먹지 않고 아 배불러, 하고 멈췄겠지만 나는 그 기다란 바게트 한 줄을 다 먹었다. 이제 힘이 나기 시작했다. 시내를 지나 이제 산이 보였다.

부슬비가 내리는 산 속을 혼자 걸으니 으스스했다. 인적도 드물었다. 그러다 차도가 나왔다. 아스팔트 때문에 발바닥이 더 아팠다. 가끔 차가 지나가는데 히치하이킹을 할까 충동이 일었다.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배낭이 크고 무거워보였다. 혼자 걷기 무서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 난 독일 사람이야. 너는 어디서 왔니?

-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 나 한국 좋아하는데. 축구도 그렇고 격투도 그렇고 잘하는 선수가 많아.

- 저는 스포츠 잘 몰라요. 어디서 오셨어요?

- 나는 어디서 왔다고 해야 하나. 나는 독일에서 태어났는데 스페인에서 살려고 해.

- 왜요?

- 난 독일 사람들이 싫어. 너무 직설적이고 심지어 공격적이야. 스페인 사람들은 즐겁게 지내고 친절해. 카나리아 제도 가봤어?

- 아뇨.

- 꼭 가봐. 내가 카나리아 섬에서 처음 스페인 사람과 문화를 접했는데 독일과 비교해서 이건 정말 신세계인거야. 이제 귀화하려고.

- 귀화라고요?

- 어 이름도 세바스찬으로 스페인 이름으로 바꿨어. 난 독일 사람들이 정말 싫어. 내가 스페인 여러 도시를 여행했는데 카나리아 섬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 정서가 나랑 맞더라고.

- 어디 가보셨어요?

- 난 한 군데에 있지 않고 여러 도시 돌아다녀. 그러다가 까미노를 알게 됐는데 이게 세 번째 까미노야. 처음에는 프랑스길 갔다가, 그 다음에는 북쪽길, 이번에도 북쪽길. 저번에는 이룬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계속 해안길로 갔어. 근데 이번에는 중간에 프리모티보라고 숲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보려고.

- 거기가 더 예뻐요?

- 산티아고 가는 여러 길 중에 가장 예쁘다고 하더라.

- 그래요? 저도 북쪽길로 가다가 중간에 바꿀까봐요.

- 그래 같이 가자. 근데 왜 넌 배낭을 그렇게 싸구려를 샀니?

아니 직설적인 독일사람 어투가 싫어서 귀화한다며.

- 산 게 아니구요. 집에 있길래… 좋은 배낭은 무슨 차이가 있어요?

- 큰 차이가 있지. 일단 가슴, 허리 부분에 벨트가 있어 끈 조절을 쉽게 할 수 있어. 그래서 배낭 무게를 분산할 수 있어. 배낭은 최대한 위로 꽉 조여야해. 배낭이 아래로 쳐지면 몸도 힘들거든. 내가 해줄게.

세바스찬 아저씨는 가슴 부분에 있는 벨트를 잠궈줬다. 배낭 벨트는 한 번도 쓰지 않았는데 너무 꽉 조여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허리 부분에 있는 벨트도 길이 조절을 해주고 배낭이 위쪽으로 몸에 밀착될 수 있게 전체 끈 길이 조절을 해줬다. 뭔가 도와주는 것같긴한데 내 몸에 너무 가까이 와서 불편했다.

- 근데 넌 왜 등산 스틱을 그렇게 잡아?

- 왜요?

- 스틱 끈에도 방향이 있어. 고리 아래 쪽으로 손을 넣으면 스틱을 잡고 손을 놓아도 팔목에 걸쳐지잖아. 그렇게 잡으면 불편하지.

- 아 이렇게 잡는 거구나. 

- 너 까미노 첫 경험이니?

- 네… 

- 어디 아픈 데는 없고?

- 발이 진짜 많이 아파요.

- 잠깐 쉬다 가자. 나한테 발 치료제 있어.

- 아 괜찮은데…

산 속에 작은 쉼터가 보였다. 세바스찬 아저씨는 배낭을 풀기 시작했다. 여러 도시 돌아다니며 산다고 하더니 침낭부터 시작해서 작은 냄비와 버너, 케찹과 마요네즈까지 나왔다. 아저씨는 배가 고프다고 하더니 소세지를 꺼냈다. 그리고 케찹과 마요네즈를 그 위에 짜서 먹었다. 직장을 다니는 게 아니다 보니 음식은 저렴한 걸 먹어야 하고 그 중 소세지가 제일 좋다고 했다. 아무리 스페인으로 귀화한다 하더라도 식단은 독일인 같았다. 부슬비 때문에 약간 춥다고 하더니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위에 헐렁한 긴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긴바지 밑단에 구멍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운동화에도 구멍이 보였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의심이 갔지만 알록달록한 천으로 싸맸고, 무늬 있는 목도리도 했다. 이 사람 집시인가?

- 아저씨 어떤 일 하세요?

- 일하지 않아. 여행 해.

- 그럼 소세지 살 돈은 어디서 구해요?

-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조금 주더라고.

무서워졌다. 내가 먼저 말 건 것을 후회했다. 배낭을 나도 모르게 꽉 붙잡았다. 정신줄은 더 붙잡아야 한다. 빨리 알베르게를 찾아야 했다. 세바스찬 아저씨는 내 발에 소독제를 뿌리고, 치료제를 바르고, 물집 전용 반창고를 붙여줬다. “아저씨, 이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먼저 재촉해 출발했다. 부슬비도 오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게도 산 속에서 나와 다시 차도를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순례자가 따라다니는 노란색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거다. 애써 불안감을 참으며 계속 차도를 걸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을까.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하나 더 단호하게 대해야 하나. 여기는 왜 이렇게 인적이 드문거야. 북쪽길을 정한 게 잘못이다. 사람이 많은 프랑스길로 갔어야 했다. 루이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내 또래였고 이 집시 아저씨보다는 착한 사람같았는데 나는 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걸까.

- 너 오늘 어디까지 갈꺼니?

- 제가 친구들이랑 같이 걸었는데요, 발이 아파서 제가 쳐지긴 했는데 빌바오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 빌바오? 너무 먼데. 비도 오는데 여기 근처가 적당하지 않을까?

- 여기 근처 알베르게요?

- 꼭 알베르게 가지 않아도 돼. 조금만 더 가면 성당이나 학교가 있거든. 거기서는 무료로 숙박할 수 있어. 근데 씻을 수가 없는 게 단점이긴 해. 씻고 싶으면 호텔도 있는데 너무 비싸니까 둘이 나눠서 내면 되겠다.

이제 진짜 무서워졌다. 표정에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배낭 끈 조절해주고, 발 치료해준 진짜 목적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 발 아픈줄도 모르고 열심히 걸었다. 정말 그 발로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게 열심히 걸었다.

- 너 진짜 잘 걷는다. 아까 발치료제 효과가 있나보다. 하하하.

아저씨가 하는 말은 이제 들리지 않았다. 화살표를 놓쳤을리 없다는 생각에 가던 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도로 표지판 뒷면에 성의 없이 그린 노란색 화살표가 보였다. 순간 눈물이 터졌다. 적어도 길을 잃지 않았고, 이 아저씨로부터 도망가야 할 일이 생기면 뛰어가야 하는 방향을 알았다. 이 것들이 화살표를 이렇게 듬성듬성 그려놓고 말이야! 길이 하나라고 이렇게 띄엄띄엄 그리면 처음 오는 사람은 불안해서 어떻게 걷냐 이 새끼들아! 나쁜 놈들! 누구한테 화내는건지 눈물 섞인 짜증을 내며 더 빨리 걸었다. 

- 아저씨 저는 이 지역 알베르게에서 잘거예요. 아저씨는 알아서 하세요.

- 아 그래? 호텔비 나눠 내는게 더 편할텐데. 알았어. 내일 또 보자. 너 연락처는 뭐니?

아저씨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 번호가 아닌 아무 번호를 눌러 주고 난 8시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는데 루이가 있었다.

- 루이야! 흐어어어엉!

안도감에 대성통곡을 했다. 부슬비는 내리고, 발바닥은 아프고, 집시를 만났고, 화살표는 보이지 않고, 인적은 드물고, 호텔을 가자고 하고, 날은 어둡고, 드디어 알베르게에 도착해 익숙한 얼굴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긴장감이 탁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루이를 부퉁켜 안았다. 곧 정신 차리고 루이를 놓고 나 혼자 울었다. 

- 그 집시 따라가지 않길 진짜 잘했다. 긴장해서 배고팠지? 같이 밥 먹을래?


처음 보는 까미노 아미고가 있었다. 마음을 많이 열지는 않지만 연 만큼은 따뜻한 세르지오 아저씨였다. 세르지오 아저씨는 포트투갈어,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4개 국어를 한다. 브라질에서 온 세르지오 아저씨, 중국계 스페인 사람 루이, 또 다른 순례자와 함께 옆에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그 동안 계속 간단하게 먹다가 처음으로 식사다운 코스 요리를 먹었다. 애피타이저 샐러드, 파스타, 해산물, 바닐라 디저트까지 다 먹었다. 와인으로 긴장감이 한 번 더 풀리면서 주로 세르지오 아저씨와 수다 폭풍을 나눴다. 극적인 하루였다. 최악의 하루가 최고의 만찬으로 마무리되어 정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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