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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05.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산타크루즈 베자나 9

천사 미겔로부터 마사지와 격려 덕분에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유럽 사람처럼 라떼와 바게트를 먹었다. 단, 바게트는 12조각 먹었다. 이제는 남을 따라가지 않고 내 속도로 가야겠다. 아무리 상대방과 대화가 즐거워도 내 몸을 잘 챙겨야겠다. 

게메스 마을을 벗어나 다음 마을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에서 약간 벗어나 바다를 감상하는 지점이 있었다. 한 순례자가 초록색 매트를 깔고 바다를 품고 있었다. 저 순례자는 어떤 이유로 까미노를 시작했을까.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을 골목골목에 그려진 노란색 화살표를 더 따라갔다. 

탁 트인 벌판에 바다가 보였다. 넓은 벌판 옆에 끝없이 바다가 펼쳐졌다. 파도가 밀려갔다가 밀려왔다. 파도 소리가 귀에 울렸다. 갈매기가 바람을 타고 있었다. 바다 바람이 뺨을 스쳤다. 이 광활함을 마시고 싶었다. 야생화를 옆에 두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절벽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과 스틱을 옆에 두었다.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게 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온몸을 휘감아 올랐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온전하구나. 내가 여기 존재함을 느꼈다. 바람이 온 몸을 다시 훑고 올라갔다. 애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나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구나.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고 여기 있는 그대로 온전함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부족하지 않았다. 칭찬 받을 필요도 없었다. 신경쓰이지 않았다.

- 니키! 괜찮니!

뒤를 돌아보니 마크 아저씨와 세르지오 아저씨가 멀리서 외치고 있었다. 

- 거기 절벽이야! 위험해! 근데 명상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 하하하. 포즈는 딱 열반에 오른 모습이다! 하하하.

이 온전함의 느낌을 몸의 감각이 기억할 것이다. 마크 아저씨가 멀리서 명상하는 사진을 찍어주셨다. 누군가의 시선에 머물렀다니 감사했다. 절벽에서 내려와 해변가를 걷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자 아까 그 초록색 매트를 깔고 있던 순례자가 보였다. 목에 화려한 넥타이 같은 것을 매고 있었다. 잠깐 배를 타고 갈 차례였다. 선착장을 가기 위해 길을 물었다. 한 사람한테 물으니까 오른쪽으로 가라고 한다. 다른 사람한테 물으니까 왼쪽으로 가라고 한다. 분명히 두 길의 차이를 설명해줬을텐데 스페인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보니 한 쪽은 마을길로 아스팔트를 걸어야하지만 짧고, 다른 쪽은 해변길로 모래길을 걸어야하지만 길었다. 난 어쩌다보니 지름길을 걸었다. 걷기 전에는 지름길을 걷고 싶었는데 걷고나니까 해변길이 더 즐거웠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든 왜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이 남을까.

배를 타고 산탄데르에 도착했다. 꽤 큰 항구도시였다. 마크 아저씨, 세르지오 아저씨, 그 외 여러 순례자들이 여기 알베르게에서 숙박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더 걷고 싶었다. 까미노 아미고들과 인사를 하고 노란색 화살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관광 안내소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여기 산티아고 가는 노란색 화살표가 어디 있나요?

- 노란색 화살표? 아 그거 어디서 봤는데…

한 할머니께서 두리번거린다. 지나가는 다른 할머니를 붙잡더니 아마 같은 질문을 스페인어로 질문했다. 두 분이 대화를 한참 하시더니 한 분이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를 이끈 곳은 화살표가 아닌 커피숍 야외 테라스였다.

- 너 뭐 마실래?

- 네? 저 산티아고 가야 해요.

- 커피 마시고 가면 되지. 잠깐 커피 마실 시간은 있지 않니.

- 아 저 가야하는데…

할머니는 이미 커피를 두 잔 주문해서 들고 오셨다.

-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가니?

- 빨리 산티아고 가야 해요.

- 산티아고 빨리 가면 뭐 하니?

- 산티아고 도착하면 묵시아나 피스테라를 가요.

- 그 다음엔?

- 포르투갈 포르투에 가요. 

- 그 다음엔?

- 다시 한국 가요.

- 빨리 가면 의미가 있니?

- 네?

- 미안해. 내가 영어에 서툴러. 빨리 가면 무슨 의미가 있니?

- 목적을 달성하는거죠.

- 그 다음엔?

- 그 다음 목적을 달성해야죠.

- 설탕이 스페인어로 뭔줄 아니? 

- 네?

- 스페인어로 설탕은 아주카르(azucar)야. 줄까?

- 괜찮아요. 

- 데스파시오(despacio).

- 네?

- 미안해. 내가 영어를 배웠는데 자꾸 깜빡하네. 천천히 가. 천천히 가면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어.

- 근데 저는 빨리 산타크루즈 베자나에 가야 해요. 더 늦으면 해가 떨어져서 알베르게를 못 찾아요. 노란 화살표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나는 커피를 원샷하고 발을 동동거리며 할머니를 재촉했다. 

그 때는 몰랐다. 혹시 할머니께서 나에게 속도를 조금 늦추고 인생의 달콤함을 느껴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고 감사하다. 내가 스페인에 갔으면 스페인 말을 배웠어야지 왜 할머니가 영어를 못한다고 나에게 사과를 해야 했을까. 어떻게 이방인에게 인생 천천히 살아라며 커피 사줄 생각을 하셨을까.

노을을 바라보며 산타크루즈 베자나를 향했다. 도대체 점심 먹으면서 일정을 마친다는 순례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왜 석양을 보고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하는걸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조금이 뭐야. 몇 분이야 몇 키로야? 분명히 이 근처인데 어디 있는거지? 

- 니키! 왔구나!

- 아저씨! 여기 맞는 거죠? 날이 어두워져서 무서웠어요. 흐엉...

알베르게 근처에서 어제 만난 이탈리아 아저씨 두 명, 스페인 아저씨 두 명 중 두 명을 만났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가워 눈물이 글썽거렸다. 알베르게 주인은 이미 온 순례자들이 있어서 벙커거 다 찼다고 했다. 나보다 먼저 온 순례자 몇 명도 다른 곳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스페인 아저씨가 스페인 알베르게 주인에게 무슨 말을 했다. 혹시 내가 머무르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해보는 것같았다. 인정 있고, 유연성 있은 스페인 사람들이다. 거실 소파에서 자도 괜찮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당연히 좋고 감사하다고 했다. 저녁 시간은 역시 8시. 샤워하고 빨래하고 거실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대화를 했다. 

- 안녕하세요. 아까 절벽에서 초록색 매트에서 바다 보신 분이죠?

- 안녕! 나도 너가 절벽 끝에서 명상하고 있는 것 봤어! 우리 정말 멋진 경험하지 않았니?

슬로베니아에서 온 모이짜는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슬로베니아에서 온 사람은 처음 만났다. 까미노에 온 이유에 대해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 너는 까미노를 왜 시작했니?

- 몇 가지가 있는데… 일단 후회를 버리고 싶어서요. 저는 후회가 많아요. 이제서야 겨우 커리어를 정하긴 했는데 남들보다 몇 년은 늦게 출발했어요. 그래서 뭐든지 빨리 빨리 하고 싶어요. 남들이 몇 년 동안 했던 일을 저는 빨리 따라잡아야 하니까요. 또 걱정도 많아요. 어머니가 몇 년 후에 실명하실거예요. 그러면 어머니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해요.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지게 되잖아요. 사실 너무 무서워요.

- 내가 살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내린 결정은 모두 옳아. 그래서 후회할 일은 없는거야. 지금 되돌아보면 좋지 않아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던거야. 그 때 상황이랑 지금 상황은 다르잖아.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 지식, 사람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된거야. 과거 상황에서는 그 선택이 좋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 선택보다 나은 선택이 보이지? 그만큼 너가 성장했다는 거야. 그리고 어머니 일을 보자. 시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거 알지? 시각이 있는 사람보다 청각과 촉각이 훨씬 더 발달해. 어머니도 마찬가지일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같아. 어머니는 물론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후부터는 새 삶에 적응하실거야. 세상에 시각을 잃은 사람들도 다른 감각을 통해 세상을 충분히 보고 있어. 오히려 너가 보는 것보다 더 세상을 잘 보시게 될껄? 너는 지금 세상을 잘 보고 있니?

과거 결정이 다 옳았다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소한 것부터 큰 결심까지 이게 최선일까,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다른 선택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지 못한 더 나은 선택도 있을텐데 그게 뭘까, 하고 항상 불안하다. 왜 더 똑똑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까. 어떻게 더 똑똑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시각이 있는 나는 세상을 잘 보고 있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늑한 가정집 같은 알베르게에는 악기가 많았다. 거실 한 구석에 피아노가 있다. 기타, 북, 흔들면 소리나는 이름 모를 악기도 있었다. 스페인 아저씨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아저씨가 맞춰 다른 악기를 흔들었다. 슬로베니아 아주머니가 북을 쳤다. 다른 이탈리아 아저씨가 함께 춤추자고 했다. 어색해서 거절했다. 쉬운 여자로 비춰질 것같았다. 안그래도 유일한 한국 사람이라 주목받고 있어서 내가 잘 행동해야 할 것 같았다. 헤픈 한국 여자가 되기 싫었다. 이 분들의 흥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어울리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딱딱하고 경직된 내 모습이 싫었다.

8시가 조금 넘자 저녁 식사 시간이다. 크고 긴 테이블에 약 20명이 앉았다. 식사 전에 까미노 아미고들의 휴대폰을 모두 거두어 알베르게 주인이 단체 사진을 각 휴대폰에 담아주셨다. 

- 하나, 둘, 셋, 니키! 자, 다음 휴대폰!

- 하나, 둘, 셋, 니키!! 자, 다음 휴대폰!

- 하나, 둘, 셋, 니키!!!

사진 찍을 때마다 이탈리아, 스페인 아저씨들이 ‘치즈’ 대신 내 이름을 외쳤다. 내 이름을 발음할 때 입꼬리가 올라가서 그런 것같았다. 새로운 구호에 모두 웃었다. 이제 모두 내 이름을 합창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20번을 외치니까 모두 다 내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른 분들 이름을 다 알지도 못하고 얼굴과 일치시키지도 못했는데 감사했다. 해외에서 내 한국 이름을 발음하거나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발음하고 기억하기 쉬운 영어 이름을 지었는데 처음으로 그 보람을 느꼈다. 

- 니키, 너 이번 북쪽길 순례의 스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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