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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25. 2022

[산티아고 순례길] 프리에스카 15

드디어 떠나는 날이다! 7시 노래가 나오기 전에 눈이 떠졌다. 7시 30분 아침 식사로 커피와 빵을 든든히 먹었다. 야외 빨랫줄에 걸린 빨래를 배낭에 넣기 시작했다. 모두와 인사하며 떠날 찰라, 마누 아저씨가 카렌듈라 추출물을 덜어주셨다.

- 자, 잘 챙겨라. 한 두 시간마다 신발 벗고 발 말리면서 이 치료제를 발라야 한다. 알겠지? 이제야 조금 나은거라 다시 무리하면 안돼. 그러면 또 물집 생기고 그 다음은 너도 알지? 

- 네! 

들뜬 마음으로 대답했다. 걸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줄 몰랐다.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부슬비가 내렸다. 자갈길과 들길을 건너 해안이 나왔다. 산타 마리나 해변이었다. 노란색 화살표가 듬성듬성 있었지만 보이지 않더라도 가는 방향을 계속해서 갔다. 지난 약 2주 동안 북쪽길에 화살표가 드문 것에 대해 혼자 욕을 많이 했었다. 특히 독일 집시 세바스찬 아저씨와 함께 걸을 때 최고로 많이 했다. 함께 가는 사람에 대한 신뢰는 전혀 없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어 두렵고, 도망가야 하는 경우 뛰어갈 방향도 몰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쫄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내 자신을 믿으면 어이없는 제안을 받더라도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고, 내 방향을 알면 화살표가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 그 길로 나아가면 될 일이었다.

혼자 걸으니까 정신이 과거나 미래로 가기보다 지금 여기에 집중이 됐다. 여행 중 최고로 정신이 맑았다. 작은 산을 거닐 때였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비에 젖은 식물 끝에 구슬처럼 이슬이 달려 있는 모습을 봤다. 영롱했다. 구슬이 똑 떨어지면 또롱하고 소리가 날 것같았다. 한 집을 지나칠 때였다. 집 압 현관부터 2층 베란다 난간까지 집 테두리마다 색색의 꽃화분이 장식되어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자주색, 심지어 연하늘색 꽃도 있었다. 연두색 집이었는데 꽃이 더 분위기를 밝게 살렸다. 평소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은 꽃을 보니 마음도 화사해졌다.

다시 흙길과 숲길을 지나 해안이 나왔다. 베가 해변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날씨가 어두워 해안이 예쁘지는 않았다. 분명히 노란 화살표가 이쪽을 가리켰는데. 모래밭으로 나오니 화살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해안 끝까지 가라는건가? 모래밭에 등산화를 푹푹 넣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나마 발바닥에 푹신해 무리가 덜 갔다. 바닷물이 모래밭을 적시는 곳에 사람 신발 자국과 개 발바닥 자국이 나란히 나있었다. 너무 귀엽잖아! 집에 있는 강아지 생각이 났다. 괜히 혼자 웃음이 났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 안녕하세요. 저 순례자인데요 혹시 저쪽에 노란색 화살표가 있는 길이 있나요?

- 없는 걸요. 저긴 이제 큰 절벽으로 막혀요. 오신 곳으로 빙 둘러 가거나 이 앞에 작은 절벽을 넘어야할 것같아요.

배가 고팠다. 빨리 절벽을 넘어가자. 배낭을 매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절반 쯤 올라가니 발 디딜 공간이나 손으로 붙잡을 돌이나 잡초가 마땅히 없었다. 안되겠다, 굴러 떨어지느니 그냥 내려가자. 내려가는 것도 미끄러워 헛발을 한 번 딛고 위험하게 내려왔다. 다시 해변 입구로 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절반 쯤 왔을 때 썬글라스가 없어진 것을 알게됐다. 

- 으아아! 어디서 잃어버린거야! 화살표는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이 거지같은 개 발자국! 

죄 없는 모래를 차며 다시 절벽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한테 물어봤으나 썬글라스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절벽을 오르내릴 때 다리를 걸친 셔츠에서 빠진 게 분명하다. 배낭을 절벽 아래 놓고 다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찾을 수 있을까? 내 동선 안에 있는걸까? 모이짜 아주머니가 알려준 자기 확신이 생각났다.

- 썬글라스를 찾을 것이다. 찾을 수 있다. 아, 현재형으로 말하랬지. 썬글라스를 찾았다. 썬글라스를 찾았다. 썬글라스를 찾았다. 오 저거 뭐야?

절벽에서 굴러 잡초에 걸려있는 썬글라스를 발견했다. 예전에 잠깐 배운 실내 암벽이 이 때 유용하게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썬글라스를 찾아 꼈다. 정말 기뻤다. 내가 까미노하면서 암벽까지 탈 줄은 몰랐다. 

기분이 다시 급 좋아져 다시 노란 화살표를 찾아 길이 있는 절벽 위를 넘었다. 조금 더 가니 마트가 보였다. 치즈와 빵을 사서 근처 잔디에 앉았다. 모자에 눌린 머리는 집시 아저씨 머리보다 더 떡져 있고, 옷에는 절벽의 흙과 해변의 모래가 묻어있고, 등산화를 벗어던지고 맨 발로 빵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거지꼴이었다. 하지만 초록 잔디에 노란 민들레가 피어있고 하얀 안개 속에 청록 산을 보면서 내가 저 산 절벽에서 썬글라스를 구출했어! 하하하! 크게 웃었다. 행복한 거지같았다.

계속 걷자 콜룽가라는 큰 글씨가 도로를 장식했다. 쥬라기 시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공룡 장식품과 쥬라기 박물관 안내판이 있었다. 조금 더 가자 마트가 더 보였다. 간식으로 건자두를 구매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는데 뒷 손님이 이거 어디 있냐고 자기도 구매하겠다고 했다. 근데 내가 사려는 건자두가 마지막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주택 단지 집 현관문 앞에는 계단 서너 개가 있는데 그 계단에서 배낭을 내리고 건자두를 맛있게 먹었다. 간식을 먹고 또 걸었다. 오늘은 1-2시간마다 멈춰 발을 말리며 걸었다. 돌로 만든 낮은 담이 있어 잠깐 걸터앉아 마누 아저씨가 준 치료제를 바르고 발마사지를 했다. 돌담을 쌓은 돌들 사이에 달팽이가 거꾸로 매달려 기어가고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지나가는 달팽이를 몇 마리 봤다. 

- 너 정말 천천히 가는구나. 그렇게 가면 언제 도착하니?

꽤 오래 걸었다. 다른 날과 달리 내 속도로, 가끔 간식도 먹고, 가끔 쉬면서 가니 크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해가 금방 질 것같았다. 마음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길이 나왔다. 달팽이 한 마리가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빤히 길을 건너는 달팽이를 봤다. 2차선 도로였고 사람도 차도 없었지만 너무 작아서 미처 보지 못하고 사람이나 차에 깔려 죽을 것같았다.

- 더 빨리 가야해! 안그러면 죽어!

계속 달팽이를 지켜봤다. 달팽이가 길을 건널 때까지 내가 망을 보고 있는 것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달팽이는 그 넓어 보이는 2차선 도로를 무사히 건넜다. 괜히 그 달팽이가 기특해 코끝이 찡했다.

- 너는 네 속도로 잘 가고 있었구나. 천천히 가는 게 아니라 네 속도로 잘 가고 있어!

누가 달팽이가 느리다고 했는가. 달팽이와 치타를 비교할 수 있을까. 달팽이가 빨리 갈 필요가 있을까. 달팽이는 제 속도로 가고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잘 가고 있다. 나도 내 속도로 가야지. 잘 가고 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다시 부슬비가 내리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안개가 뿌옇게 깔려 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없었다. 언덕을 오르내리는데 트랙터, 트럭, 공장, 창고가 보였다. 큰 개 두 마리가 짖었다. 여기 도살장인가?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살아있는 소가 바로 옆에 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소고기를 먹는 것도 신기했다. 집들이 보였다. 그런데 폐가였다. 이 중 몇 집에서나 사람들이 살까 궁금했다. 최악의 경우 알베르게를 찾지 못한다면 폐가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여기서는 누가 살해당해도 아무도 찾지 못할 것같았다. 알베르게가 보였다. 안에 다른 순례자들이 저녁 식사하는 게 보였다. 그 중 다섯 번째 날 포르투갈레떼 난민 수용소같은 학교를 개조한 알베르게에서 만난 남아공 노부부가 있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멀리서 손을 휘둘렀다. 나를 보지 못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 그 사이에 내가 죽어서 귀신이 된 건 아니지? 현관문을 열고 부엌쪽을 행했다.

- 안녕하세요. 

- 니키! 다시 만나는 구나! 어디서 왔니!

- 저 발을 다쳐서 작은 산마을 꾸에레스에 이틀 있었어요.

- 꾸에레스에서 여기까지면 37km야!

- 괜찮아요. 어제 하루 쉬어서 오늘 조금 많이 걸었어요.

- 그 스페인, 이탈리아 사람 네 명이 널 찾던데. 그 넷은 이미 버스 타고 한참 앞으로 갔을거다.

- 버스를 탔다구요? 저는 이렇게 악을 쓰며 걷고 있는데.

- 나도 처음에는 배낭 들지 않고 다음 알베르게로 부치거나, 걷지 않고 차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좋지 않게 봤어. 그런데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는데 누가 누굴 판단할 수 없겠더라. 자기가 만족하면 그만이지.

- 그러네요. “다른 순례자들의 까미노 방식을 존중한다” 라는 글귀도 봤어요.

- 그렇지. 여기 스파게티랑 샐러드 좀 먹을래?

토마토 스파게티였다. 이탈리아 아저씨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분들이 만든 스파게티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듬뿍 들어있는 애호박, 파프리카, 양파가 아삭거리는 식감을 만들어 더 맛있었다. 올리브는 이제 김치보다도 더 익숙해졌다. 짭쪼름한 맛이 한국 가서도 계속 찾게될 것같았다. 직전까지는 먹을 것도, 먹을 곳도 없었는데 저녁식사 시간에 딱 도착해 바로 먹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먹을 복은 확실히 있는 것같다. 옆에 처음 보는 스페인 아저씨도 있었다.

- 너가 니키구나.

- 네 안녕하세요. 저를 아세요?

- 알지. 마크 알지? 너가 절벽에서 명상하고 있는 사진을 찍었다고 하던데.

- 하하하. 네 마크 아저씨요.

- 마크도 그렇고 스페인, 이탈리아 사람들도 니키 못봤냐고 같이 다니다가 사라졌다고 찾았어. 그리고 어디 작은 알베르게에서 사진 찍을 때 치즈 대신 니키라고 외쳤다며.

- 하하하. 네 산타 크루즈 베자나 알베르게요. 제 이름이 쉬우니까 좋네요.

-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 북쪽길 까미노에서 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꺼다!

- 하하하. 

여기 알베르게는 독특하게 샤워 부스 안에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뜨거운 샤워 물줄기를 맞을 때 그 감동은 잊을 수 없다. 

꾸에레스에서 이틀 동안 감사 일기를 썼던 게 생각났다.

-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 감사합니다.

- 칼렌듈라 치료제를 받아서 감사합니다.

- 발이 괜찮아서 감사합니다.

- 암벽 타고 썬글라스를 구출해서 감사합니다.

- 꽃 옆에서 산을 보며 점심을 먹어 감사합니다.

- 마트에서 마지막 건자두를 득템해서 감사합니다.

- 제 속도로 가는 달팽이를 보고 깨달아서 감사합니다.

- 생각보다 늦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 인생은 성취가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걸 직접 느껴서 감사합니다.

- 인생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걸 직접 느껴서 감사합니다.

- 결국 알베르게를 찾았듯이 결국 내 인생도 잘 끝날 것이라고 느껴서 감사합니다.

지난 이틀보다 감사한 게 더 생각이 많이 났다. 계속 감사일기를 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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