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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Jul 27. 2022

[산티아고 순례길] 폴라 데 시에로 16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길에 올랐다. 계속 해안선을 따라 북쪽길을 갈지 아니면 중간에서 숲이 있는 프리미티보길을 갈지 중간에 갈림길이 있었다. 후자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확실히 정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가본 적이 있냐고, 어느 길이 더 좋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앞에 보기 드문 동양 아주머니가 있었다.

-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니키예요. 어디서 오셨어요?

- 안녕. 나는 미국에서 온 그레이스야.

동양 사람으로 보였지만 진짜 어디서 왔냐고 혹은 선조는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혹시 실례가 될까봐 묻지 않기로 했다.

- 이 번이 몇 번째 까미노세요?

- 이번이 여섯번 째야.

- 여섯 번이요? 만난 사람들 중에 제일 많이 가보신 것같아요. 네 번까지는 봤는데.

- 너는 몇 번째니?

- 저는 처음이에요. 북쪽길 이룬에서 시작했어요. 걸은지 보름 조금 넘었는데 오늘 프리미티보 갈림길을 만난다고 들었어요. 그러고보니 북쪽길이나 프리모티보 가보셨어요?

- 응 작년에 너처럼 북쪽길 갔다가 중간에 프리모티보길로 바꿨어.

- 어땠어요? 북쪽길 후반 길이 전반 길보다 좋은가요?

- 비슷했던 것같아. 해안길로 가다가 결국 산티아고 가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와야 하니까. 나는 프리모티보는 가봐서 이번에는 북쪽길로 쭉 가려고 해.

- 비슷하면 프리모길이 낫겠네요. 까미노는 한 번 경험하는건데 프리모티보 가면 두 가지 길을 다 경험할 수 있잖아요.

이로써 결심했다. 독일 집시 세바스찬 아저씨를 만날 수도 있지만 만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프리모티보길을 가야겠다.

- 하하하. 다시 까미노를 다시 하고 싶지 않니?

- 네. 너무 힘들어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 어떤 점이 힘들어?

- 발바닥이요. 걷다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 자기 속도를 찾는 것도 까미노의 한 과정이지.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없어. 걸으면서 찾는거야.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하루 적정 거리와 속도를 알게 돼.

- 네. 몸을 혹사시킨 후에야 그 교훈을 배웠어요. 그런데 왜 여섯 번이나 하세요? 힘들지 않으세요?

- 몸과 마음 둘 다 건강해지는 길이니까. 내가 얼마 전에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심장 나이가 17살이래. 내가 내일 모레 70살인데. 하하하.

- 와 진짜 건강하시네요!

- 걷는 게 가장 좋은 운동이라는 게 맞는 말인 것같아. 내가 대학교에서 가르쳐서 방학 때 여행도 하고 가끔 까미노를 왔어.

- 정말 자유롭네요. 직장인은 이렇게 한달 이상 휴가 내기 쉽지 않은데.

- 내가 진짜 자유로워진 건 이혼하고 난 후야. 하하하.

- 네? 하하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50%이라더니 정말 거리낌 없이 말씀하셨다.

- 더 자유로워졌어요?

- 미루다 미루다 거의 36년만에 이혼을 했어. 온 가족과 친구들이 반대를 했었지. 근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아야 해. 다들 결혼하니까, 다들 애 낳으니까 나도 그걸 원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알고보니 나는 별로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애도 낳고 싶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주변 분위기상 나 혼자 다르면 압박이 느껴지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한다고 착각하는 것같아.

- 이혼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 하하하. 단 1초도 없어. 

- 살면서 후회하는 게 있어요?

- 더 일찍 이혼하지 않은 것. 하하하.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너는 원하지 않는 게 있으면 나만큼 오래 끌지 말고 끝내렴. 하하하.

- 초반부터 이혼하고 싶었어요?

- 초반에는 몰랐지. 그 때는 어렸고 처음으로 오래 만난 남자친구였는데 육체적으로 너무 잘 맞는거야. 하하하.

- 네? 하하하.

또 예상치 못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 결혼 전에는 나한테 맞춰주려는 노력은 했던 것같아. 배려도 하고, 외향적인 활동도 하고. 그런데 결혼을 하니까 본래 모습을 보이는거야. 이기적이고, 집에만 있으려 하고. 

- 저랑 비슷하네요. 저는 여행 좋아해요. 어디라도 나가지 않으면 지루해요. 근데 남자친구는 여행을 싫어해요. 

드디어 예전에 프랑스 니콜 아주머니와 스페인어 단어로 띄엄 띄엄 말했던,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미국 그레이스 아주머니에게는 영어로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 남자친구는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한 30개 국가를 가봤나? 근데 남자친구는 여권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 뭐라고? 여권이 없어?

- 저도 충격적이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예요. 저는 뭔가 새로운 걸 항상 하고 싶어해요. 도전하고 성장하고 싶어해요. 근데 남자친구는 여권이 없는 현재가 만족스럽고 감사하데요. 저는 목표랑 꿈이 큰 사람이에요. 그런데 남자친구는 딱히 야망같은 게 없어요. 그런 면이 약간 답답한데 결혼까지 하자고 하니 혼란스러워요.

- 둘이 정말 다른데 왜 계속 만나는지 모르겠네. 희한하다. 결혼은 연애와 달라. 공통점이 있어야 하고 함께할 수 있는 점이 있어야 해. 둘이 비슷하면 약간의 조정만 있으면 되지만 차이가 크면 둘 중 하나가 매 번 크게 양보를 해야 되거든. 그러다보면 분노가 쌓여.

- 남자친구가 많이 양보를 해주는 편이긴 하는데 그게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저를 이만큼 사랑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건 본인도 자부하고 있어요. “나만큼 너를 이렇게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껄!” 이러더라구요.

- 너가 너 스스로를 볼 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 사랑받을 자격이라… 사랑이 뭔데요?

- 사랑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지. 너만의 정의를 내려야 해. 내가 정의하는 사랑은 주려고 하는 마음이야. 내가 받은 것보다 더 주고 싶어하는 마음. 네 정의에 따른 사랑이라면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 장점만 보면 괜찮은데 단점을 보면 모르겠어요.

- 단점을 고칠 수 있니?

- 단점이라기보다 제 고유 성격이 있는데 그것까지 고치기 힘들 것같아요. 아마 그런 성격 차이로 두 번 헤어졌었거든요.

- 이미 두 번 헤어졌던 건 좋은 신호가 아닌 것같은데.

- 제가 독립심도 자존감도 낮아서 제가 사랑받을 수 없다고 보는 걸까요?

- 너가 자존감이 낮다고? 너 혼자 여기 온 거 자체가 자존감이 높다는 증거인데!

- 여기는 길이 정해져있잖아요. 아주머니는 탄자니아 킬리만자로도 가보셨다면서요!

- 킬리만자로는 이렇게 한달 이상이 아니라 열흘도 안됐었을꺼야. 가이드도 있었고. 내 생각에 너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너의 기준이 아니라 타인, 사회 기준을 충족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같아. 그 발처럼. 하하하.

- 하... 발은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근데 6번 까미노 하면서 물집나고 아픈 적 없었어요?

- 지금 너도 느끼겠지만 나는 빨리 걷지 않아. 그리고 걷는 거리도 길지 않아. 알베르게에 점심 때쯤 도착해서 찬 물에 발을 담그고 붓기를 뺴. 그리고 풋크림으로 발을 마사지해줘. 구석구석 충분히 문지르고 바세린으로 발가락, 앞, 뒤, 옆, 사이 구석구석을 바세린으로 발관리해. 무릎은 등산스틱이 있어서 다행이고. 발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니?

- 맞아요. 까미노에서는 얼굴보다 발이 더 소중해요. 저도 얼굴에 쓰는 신경 1/100이라도 발에 썼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 근데 너 피부 좋다. 몇살이니?

- 아 저는…

- 대학생 아니야?

- 하하하. 아니예요. 저는 제 나이 밝히는 게 부끄러워요.

- 나는 내일 모레 70살이라고 말했지? 난 내 나이 좋은데. 너도 너 나이를 인정하렴. 하하하.

- 제가 제 나이에 비해 독립심이 없는 것같아요. 여기서 저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똑 부러지게 여행을 하는 것보면 나는 지금까지 뭘했나 자괴감이 들어요. 그런 애들이 부러워요.

- 부모가 많이 챙겨주는 편이었니?

- 그런 것같아요. 

- 부모 도움을 많이 받지 못해 독립적인 애들은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은 너같은 애를 부러워할껄? 사람은 꼭 자기에게 없는 걸 부러워하더라. 부러워할 일도 아닌데. 하하하.

- 초반에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같이 다니니까 제가 그 사람들한테 의지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독립심 키우려고 여기 온건데. 그래서 제가 더 빨리 걷기 시작했어요. 의지하기 싫어서요.

- 스스로 독립심이 낮다고 말하더니 의지하기 싫어서 떠난 게 독립심이 낮은거니? 하하하.

숲 속을 지나 시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 내 일정은 여기까지야. 너는 더 갈꺼니?

- 네 저는 프리모티보길 초반까지 가보려구요.

- 그래. 그 공통점 거의 없는 남자친구는 지금은 결혼하지 않는 게 어떨까 해. 결혼은 설득당해서 상대방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네 생각이 확실할 때, 너가 원할 때 결정하는거야. 알겠지?

- 네!

- 너는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야. 자존감도 있고, 독립심도 있어. 단지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고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같은데 네 기준을 찾길 바래. 그리고 확신을 갖고 네 기준을 따라가. 알았지?

- 와. 감사합니다. 네!

강렬하고 담백한 만남이었다. 전화번호도 서로 묻지 않고 깔끔하게 헤어졌다.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대화를 가감없이 이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기욘과 오비에도를 가르는 교차점이 나왔다. 북쪽길과 프리모티보길을 나누는 지점이었다. 그라세스라는 표지판이 보였는데 엄청난 분기점이 아니라 좁은 갈래길이 있었다. 표지판을 하나 더 세우지 않았더라면 조개껍데기가 그려진 낡은 돌 표지판을 놓치고 계속 가던 길을 갈 수도 있을 듯했다. 사소한 선택이 나비효과처럼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가. 어쩌면 인생도 큰 선택뿐만 아니라 작은 선택을 통해서도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같다. 1-2시간마다 발을 말리고, 간식으로 오렌지도 먹으면서 혼자 프리모티보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오늘은 한 번도 노란 화살표를 잃지 않고 폴라 데 시에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 니키! 너 어디 있다가 이제 오니!

모이짜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의지하기 싫어서 떠났는데 또 다시 만나다니. 기쁘면서 슬펐다.

- 여기 후안-칼로스도 있어. 이탈리아, 스페인 남자 넷 중 한 명만 프리모티보길 오고 나머지는 북쪽길로 계속 가거나 일정상 집으로 갔데.

- 아 네...

일단 뜨거운 물로 샤워하기로 했다.

- 니키! 밥 먹었니?

모이짜 아주머니가 공동 샤워실 입구에서 질문했다.

- 아니요. 아직이요.

- 내가 준비해놓을테니 끝나고 식당으로 내려오렴!

- 네…

감사하긴 했지만 이게 반복되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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