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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Aug 03. 2022

[산티아고 순례길] 살라스 18

“일정 상 더 빨리 가야 해서 먼저 출발합니다. 부엔 까미노!”

모이짜 아주머니에게 메모를 남기고 온몸에 가려운 느낌을 주는 알베르게를 떠났다. 

상쾌한 아침이다. 발걸음도 가볍다. 이제야 프리모티보길 명성에 맞게 숲 속을 걸어들어갔다. 사방이 숲이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졌는데 초록 넝쿨이 갈색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 결국 온 세상이 초록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색 도화지에 들어온 것같았다. 심호흡을 하며 나무와 풀 향기를 맡으며 아침 숲이 뿜어주는 싱그러운 기운을 온 몸에 담았다. 

숲을 지나 한 마을을 지나가자 하늘이 흐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노랑색 화살표를 따라간 것같은데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일단 신발을 보호해야 했다. 비닐봉지를 뜯어 등산화 위쪽을 단단히 묶었다. 우비를 가방 위까지 함께 덮어 비를 뚫고 갔다. 종아리 높이의 잡초길로 계속 나아갔다. 옆에 차도와 기찻길이 있어서 이쪽 방향이 맞는 듯했다. 하지만 길은 이어지지 않았다.

- 야 이것들아! 노랑색 화살표를 더 만들어야 할 것 아니야!!

주변에 사람들도 없고, 빗소리도 커서 마음껏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도로시도 아닌데 노랑색 화살표를 따라 길을 가는 게 힘들었다. 다 때려치고 싶었다. 지금 마을 아스팔트길이라 다행이지 숲에서 이 비를 만났으면 흙탕물을 어떻게 건넜을까 아찔했다. 잡초길에서 나와 가까운 집에 노크를 했다. 짧은 스페인어로 길을 물었다.

- 안녕하세요. 순례자입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노랑색 화살표 길을 가나요?

- 어느 지역으로 가세요?

- 살라스요.

- 이쪽으로 가세요.

- 비가 오늘 하루종일 오나요?

- 모르겠습니다.

내 말을 모르겠다는건지 기상예보를 모르겠다는건지 일단 다른 길로 걸었다. 다 그만두고 싶었다. 원효대사는 멀리 가지 않아도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도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다. 기차역이 보였다. 나는 큰 결심을 내렸다.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안내원도 없고 지도를 보니 살라스행 기차 노선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자전거를 타고 산티아고를 가는 듯한 스판을 입은 순례자에게 길을 물었다.

-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살라스로 가는 기차가 있나요?

- 없습니다. 

온전히 자신의 발로 걷는 것이 순례자의 정석이다. 나는 기차를 타겠다는 정석을 어기겠다는 대단한 결심을 했는데 너무 쉽게 무산됐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걸을 수밖에 없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마트를 찾았다. 살라미, 치즈, 빵이 너무 지겨웠다. 참치와 빵을 샀다. 밖에서 먹고 싶었지만 비가 계속 와서 양해를 구하고 마트 한 구석에 앉아 참치빵을 먹었다. 참치를 빵에 올리는 순간, 참치가 마트 바닥에 떨어졌다. 비와 땀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되고, 비닐봉지로 등산화 커버를 만들었어도 흙탕물로 뒤덮힌 등산화를 신은 나는 자존심도, 인간존엄성도 버리고 그 아까운 참치를 주워먹었다. 딸랑. 예전에 함께 걸었던 폴란드에서 온 마르타가 종소리를 울리며 마트에 들어섰다.

- 니키 오랜만이다! 여기서 뭐해?

마르타가 그 거지같은 장면을 봤든 말든 나는 신경쓰지 않고 건조하고 딱딱한 참치빵을 마저 먹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걸어 나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방금 식사를 마쳤는데 눈 앞에 먹을 게 펼쳐졌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장에서 살라미, 치즈, 빵, 야채, 과일 등을 구매했다. 시식하는 곳도 많았는데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다양한 맛을 볼 수 있었다. 

든든히 먹길 잘했다. 몇 시간을 걷다가 오르막길이 나왔다. 욕을하면서 씩씩거리며 올랐다.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장터를 지난 이후로 비는 멈추었다. 그래도 하늘이 흐려 하루종일 ‘해가 납니다, 해가 납니다' 기도하면서 걸었다.

내리막길을 걷자 곧 마을이 나왔다. 식수대가 보여 물병을 채웠다. 더 가니 작은 아기 고양이가 의자 위에 있고 먹을 것이 작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커피, 우유, 파운드 케이크, 사과, 바나나가 있었다. 순례자를 위해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고, 원하는만큼 기부액을 상자 안에 넣는 방식이었다. 딱딱한 바게트만 먹다가 부드러운 파운드 케이크를 먹으니까 입 안도 마음도 녹는 기분이었다. 주인은 왜 이렇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일까? 자신들도 까미노를 하고 너무 좋아서 다음 순례자를 돕는 것인가?

아스팔트길, 숲길, 자갈길, 흙길을 지났다. 든든히 먹은 덕분에 힘을 내 계속 걸었다. 프리모티보길은 이렇게 생겼구나. 북쪽길은 어떻게 생겼을까? 프리모티보길은 북쪽길보다 더 예쁘지만 더 힘들다고 들었는데 괜히 오기를 부렸나? 진짜 더 이쁘긴 한걸까? 북쪽길이 더 예쁘면 어떡하지? 아니야 프리모티보길이 분명히 더 예쁠거야. 더 예쁘고 더 힘드니까 더 의미 있을거야. 프리모티보길로 바꾼 것은 아주 잘 한 선택이야. 아냐 북쪽길로 갈껄 그랬나.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날씨처럼 내 마음도 왔다갔다했다. 프리모티보길을 의심했다가 다잡기를 반복했다.

시내가 보이고 알베르게가 나올 차례인데 내가 찾는 알베르계는 시내 맨 끝에 있었다. 문을 두드렸는데 나오는 사람도 없었고 안내서가 붙어있었다. 옆집 레스토랑 주인과 다른 손님을 통해 알아보니 공사 때문에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대신 주인이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줬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였다. 제일 늦게 도착했지만 다행히 침대가 남아있었다. 작은 알베르게였는데 다른 순례자들은 8시에 이미 저녁을 먹고 식당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음식이 남았다며 나에게 먹을 것을 권유했다. 먹을 복도 있지. 나는 도착하자마자 푸실리 파스타, 토마토, 계란찜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10시쯤 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가 취침을 하기 시작했다. 까미노의 기쁨 중 하나는 여러 국적의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그 기회를 놓친 것같아 약간 아쉬웠다.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 시작한 여행인데 엄마-딸 관계가 되어버린 모이짜 아주머니를 떠나기로 한 내가 자랑스럽다. 모이짜 아주머니와 함께한다면 더 편한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편하고 싶은 게 아니라 고생을 하더라도 생존력을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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