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멜레온 Aug 05. 2022

[산티아고 순례길] 깜삐에요 19

소원을 잘못 빌었다. 지금까지 까미노 중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 

햇빛을 박탈당한 날이다. 

햇빛에 감사한 날이다. 

햇빛은 당연한게 아니다.

아침부터 안개가 숲 속에 깔렸다. 고요함 속에 청량한 새소리가 들린다. 계속 오르막길이라 내리쬐는 햇빛이 없는 건 다행이었다. 사방이 높은 나무가 우람한 숲이었다. 길에서 벗어나면 얼마나 가파른 비탈길로  굴러떨어질지 안개가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제 비가 내린다. 어제도 이 곳에 비가 내렸는지 바닥이 전부 진흙길이다. 큰 웅덩이 때문에 길 가운데로 가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등산스틱을 찍어 간신히 작은 웅덩이를 징검다리 건너듯 넘었다. 그런 웅덩이가 수 백 개였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두 등산스틱에 체중을 가하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발이 젖지 않도록 발끝을 세웠는데 등산화를 신고 발레하는 꼴이었다.

그렇게 웅덩이를 피하며 지그재그로 걷는 도중 한 사람을 만났다.

- 안녕. 이스라엘에서 온 쇼샤나야.

- 안녕. 한국에서 온 니키야.

- 까미노 해본 적 있니?

- 아니 처음이야. 너는?

- 나는 까미노는 처음인데 하이킹은 좋아해서 많이 해봤어. 터키, 불가리아, 영국, 그리스, 루마니아...

여행에 테마가 있다면 쇼샤나의 테마는 하이킹이었다. 말한 나라들에 유명한 하이킹 코스가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 다 괜찮은 곳이야. 혹시 한국에도 좋은 하이킹 코스가 있니?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도보나 등산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청계산, 남산, 관악산은 많이 높지 않은 산이었다. 내가 가봐서 들어봤는지, 많이 들어봐서 가봤다고 착각하는 건지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정도가 떠올랐다. 

- 한국은 산이 많아서 사람들이 등산을 좋아해. 그런데 까미노처럼 한 달 이상으로 연결된 코스는 들어보지 못한 것같아.

대답을 하면서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도 까미노처럼 한 달 이상 걸을 수 있는 하이킹 길을 만들면 어떨까.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해외 관광객도 몸과 마음을 건강히 하는데 도움이 되고 자연을 보존하면서 관광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이라 예상된다.

- 까미노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니?

- 응. 너는 이스라엘로 가니?

- 나는 아직 모르겠어. 프랑스길도 가고 싶어서 프리모티보길 끝나면 바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어.

- 바로 시작한다고? 몸이 힘들지 않아?

- 하하하. 워낙 하이킹을 좋아하고 익숙해서.

- 집은? 그렇게 오래 비워도 돼? 짐은? 부족한 거 없어?

- 내가 프리랜서다 보니까 몇 개 국가에 몇 년씩 돌아다녔어. 그래서 짐이 적은 편이야. 옷이나 책이 조금 있는데 대부분 버리거나, 팔거나, 기부해. 

- 나도 머리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으로는 예쁜 게 갖고 싶고, 버리기는 아깝더라.

- 나는 이사를 많이 다니다보니 물건을 많이 두지 않아. 다 짐이더라. 내 배낭도 다른 순례자들에 비해 작지? 난 이렇게 가벼운 삶이 좋아. 

-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멋지다. 나는 화장품이랑 책 때문에 어깨가 아플 정도로 가방이 무거워. 다 쓰지도 못하고 다 읽지도 못하는데 버리지도 못하겠어.

- 하하하. 하이킹을 하면서 배운 게 있어.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알게 돼.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돼. 정말 필요한 것은 몇 개 없어. 작은 가방 하나면 돼. 나는 물건 욕심이 없는 대신 사람 욕심은 있어.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각자 갈 길도, 속도도 달랐다. 오늘 진흙탕 길을 헤쳐 나가느라 온 몸에 진이 빠지는 날이었다. 불행 중 다행은 이제 내 속도를 알고 아무리 대화를 하고 싶어도 상대방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운이 좋게 깔끔한 알베르게 한 곳을 찾아 지친 몸을 뉘었다. 그리고 감사일기를 썼다. 

- 비가 심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 안개가 심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 진흙길이 심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 가끔 흙길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 가끔 풀길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작가의 이전글 [사십팔 필라테스] 30. 인바디 그리고 2: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